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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돈버는 독서모임 - 부의 전략수업
독서멘토, 독서리더

안녕하세요~
부의 에너지로 가득한 1풍요입니다.
열한계단이라는 책은 추천을 받아서 읽은 책인데요.
열한계단은 무엇이며, 열한계단의 끝에는 무엇이 있는지 호기심을 가지고 읽었습니다.
한계단씩 올라가면서 시야가 넓어지고 관점이 다양해짐을 느낄 수 있는 책이였습니다.
다음은 기억하고 싶은, 또는 배움을 얻을 수 있는 부분을 적어보았습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글귀는
“모든 것은 네 마음의 반영이고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이 글귀를 봤을 때 커다란 책임감이 나를 짖눌렀습니다.
내 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이 나의 마음에 대한 반영이라면 지금까지 일어난 안좋은 상황들이 타인 탓이 아닌 내 탓이 되어버렸으니까요.
그리고 타인의 탓이라고 생각하면서 회피하려는 마음을 들킨 것 같아 불편한 마음도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앞으로의 나의 행동이 내가 어떤 마음을 가졌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므로 나의 마음만 제대로 하면 될 것이라는 희망도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위의 글귀를 읽고 어떤 생각이 드셨나요?
내 마음이 거울처럼 현상을 만든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마음가짐으로 살아가야 할까요?
결국 내 앞에 펼쳐진 모든 상황을 기꺼이 받아들이고 배움의 기회로 만드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야말로 삶을 풍요롭고 평온하게 만들거라 생각이 듭니다.
p21 불편함은 성장의 신호라는 건, 삶의 체험 속에서 얻는 소중한 깨달음이다. 그런데 이러한 깨달음을 이론적으로 정립한 사람이 있다. 정-반-합
P87 때로는 멀리 돌아가야 할 때도 있다. 그래야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다. 재수 생활도 집안 살림의 어려움도 성서 속의 질문들도 곧바로 얻거나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인지도 모른다.
p96 삶 전체를 통틀어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그 순간은 대학 1년 여름방학, 몽골로 떠난 봉사활동 중에 있었다.
p107 니체는 근대 유럽사회를 진단한다. 그리스도교는 유럽을 병들게 했다. 노예의 도덕, 원한과 증오의 도덕이 유럽인들을 잠식하고 있다. 신에 대한 순종, 복종, 겸손, 절제라는 도덕 가치릐 본질은 건강하지 않다. 이제 인간은 초라하고 수동적이며 부정적인 존재가 되었다.니체의 진단에 대한 당신의 생각은 어떠한가? 니체의 평가가 과하다고 생각하는가? 그렇지는 않는 것 같다. 우리는 실제로 본다. 연단에 서서 사람들을 향해 순종과 복종을 말하고 겸손과 절제를 강조하는 사람들의 감춰지지 않는 분노를 말이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들이 무엇인가 거대한 것을 등에 업으려고 노력한다는 것이다. 신을 말하고, 애국을 말하고, 도덕과 올바름을 말하는 사람들. 우리는 의심해야 한다. 왜 그들이 지금 내 앞에서 신에 대한 순종을 말하는지, 왜 국가에 대한 복종을 말하는지 왜 나에게 겸손하고 절제하는 도덕적인 삶을 살라고 강조하는지 그러한 강요를 통해 도대체 자신은 무엇을 얻고 싶어하는 것인지를 의심의 눈으로 직시해야 한다.
p155 여기에는 어떠한 이유나 목적도 없다. 성장도 없고 휴식이나 끝도 없다. 다만 영원히 같은 삶을 반복할 뿐이다. 어떤가? 당신은 영원회귀의 진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지는가? 끔찍한가? 아니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신의 삶을 긍정할 수 있는가? 이런 영원회귀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허무주의의 최고 형태다. 이러한 극단적인 허무를 인정하고 나의 삶을 끌어안을 수 있는 존재,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한 번 더!"라고 외치며 허무의 깊은 심연 속으로 뛰어들 수 있는 존재, 그가 바로 초인이다.
p156 어느날, 당신이 좌절한 그 어느 날 밤,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고통스러운 순간에 악마가 찾아온다. 그리고 당신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이 순간은 영원할 것이다. 너의 삶은 어떤 목적이나 이유도 없이 영원히 반복될 것이고, 이 고통의 순간은 영원히 너에게 되돌아올 것이다.
당신에게 묻고 싶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신은 "그래!"하고 외칠 수 있는가?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고통스러운 당신의 삶 전체를 앞에 두고 "이것이 인생이라면, 그래 다시 한 번!"이라고 긍정할 수 있는가?
p251 두 가지가 병행되어야 한다. 책과 삶이, 이상과 현실이, 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p316 운좋게도 멈춰 설 기회를 얻었으니, 뒤돌아 가서 놓고 온 것들을 챙기세요. 그리고 다시 천천히 걸어가세요. 또 다시 허둥지둥 달려오면 안 돼요. 길에서 만나는 사소한 것들을 돌보면서 오세요. 그렇게 천천히 인생의 마지막에 닿았을 때, 우리는 알게 될 것입니다. 삶이 당신에게 정말 주고 싶어 했던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에요.
p333 우리가 이 세상에 온 이유는 현 시대가 구획지어놓은 과학과 학문이라는 영역 안에 머물며 거기서 인정받기 위해서가 아니다. 우리는 신기한 것들을 만나고 놀라워하며 삶의 의미를 풍부하게 이해하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 합리주의라는 근현대의 기준 안에 당신의 드넓은 영혼을 구겨 놓지 않기를 바란다.
p349 중요한 것은 눈앞에 펼쳐지는 광활한 공간과 다양한 존재들이 실제로는 나의 외부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p351 그대의 바깥쪽에 존재하는 그것들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다. 이것을 깨달아야만 한다.
p353 나느 강렬한 충동에 휩싸인다. 자궁으로 들어가고 싶다고 느낀다. 이제 내가 만약 남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남자의 느낌이 차츰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강한 증오와 어머니에 대한 강한 애착과 매력을 느끼게 된다. 만약 내가 여자로 태어날 예정이라면 여자라는 느낌이 서서히 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어머니에 대한 강한 증오와 아버지에 대한 강한 매력과 애정을 느끼게 된다. 이 강렬한 감정이 원인이 된다. 나는 자궁 속으로 들어선다.
p355 그렇다면 네가 느끼는 그 허망함도 외부에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네 마음의 산물임을 이해하겠구나.
허망해하지 마라. 너는 잘하고 있다. 좋은 생각을 하고, 좋은 행동을 해라. 미련과 아쉬움과 후회를 만들지 마라. 심판받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다. 너를 심판하는 존재 같은 것은 없다. 삶과 죽음이 바로 너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p356 네 마음이 전부다. 그것을 이해해야 한다. 세계가 있고 너의 마음이 있는 것이 아니라, 너의 마음이 세계를 그려낸다. 너의 바깥에 너의 존재와 독립된 외부 세계가 있을 거라는 환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것은 마치 꿈과도 같지. 꿈속에서 웃고 울고 마음 쓰지만, 실제로는 네 마음 외에 아무것도 없었떤 것처럼. 실재라고 믿어왔던 이 세상도 그러하다. 모든 것은 네 마음의 반영이고 네가 만들어낸 것이다.
p358 내가 보고 듣는 방식으로 세계를 구성하는 건 나 자신이죠. 칼 융은 "티벳사자의 서" 해설을 쓰면서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요. 이책은 그 첫 문장부터 모든 주어진 것의 "주는 자"가 바로 우리 자신 안에 있다는 사실을 깨우쳐준다. 우리가 모든 것을 창조해 낸 장본인이고, 모든 결정을 내린 주인공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 대부분은 세상을 자신의 마음이 창조했다고 보기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선 무엇보다도 관점의 대전환이이 필요하며, 여기에는 많은 희생이 뒤따르기 때문이다. 인간이 가진 동물적 본능은 환경의 창조자로서 자신을 보기를 거부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런말도 덧붙이죠. "티벳사자의 서는 그것에 대해서 어떤 해설을 쓰더라도 닫힌 책으로 시작해 닫힌책으로 남는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만 영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에게만 열리는 책이기 때문이다.
p364 소중한 것일수록 곁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가족은 함께 살아야 하고, 부부는 서로 숨기는게 없어야 하고, 자녀는 속마음을 부모에게 말해야 하고, 연인은 모든 추억을 함께해야 하고 친구는 나와 가장 친해야 하고, 세상은 나를 받아줘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 인간의 눈과 입은 원래가 모난 까닭에 가까운 대상일수록 쉽게 흠을 찾아내고 쉽게 상처를 입힌다. 소중한 사람이라면, 지켜주고 싶은 사람이이라면, 그들이 상처입지 않고 건강하게 자랄 수 있도록 그들을 당신으로부터 밀어내야 한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세상으로부터 당신을 보호하는 방법은 그들로부터 멀어지는 것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과 함께 있는 시간이 아니라, 그들을 그리워하는 시간이다.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외로운 시간이 필요하고 아무 말도 없이 깊은 내면으로 고독해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p366 다만 충분히 차오르지 못한 채 나온 것은 아닌지, 그만큼 동ㅇ굴로 돌아가야 하는 시간이 빨리 찾아오는 것은 아닌지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소중한 것일수록 멀어져야 하고, 그리워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니까. 세상 속에서 나와서 선물처럼 만나게 된 소중한 사람들을 즐겁게 그리워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언젠가 나의 동굴로 돌아가야만 한다.
(중략)
내가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에서 가장 놀라운 신비는 단적으로 말해서 나와 세계의 관계다. 나는 누구인지, 존재는 무엇인지, 나의 세계는 도대체
p378 "네가 바로 그것이다." 자신이 바로 그것, 즉 아트만이고 또한 브라흐만임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내가 누구인지를 명확하게 이해하게 된다. 나는 세상에 던저진 그저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나를 비롯한 모든 존재는 우주의 근원과 이어진 위대한 존재인 것이다. 우파니샤드는 자아와 우주 그리고 이들의 상호관계를 설명해주는 하난의 철학서다. 하지만 범아일여의 사전적 정의를 알았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을 실제로 알게 된 것은 아니다. 범아일여를 알게 되었다는 것은 오랜 수행과 명상 그리고 깊은 사색을 통해 그것을 체험함으로써 통찰함을 의미한다.
p379 깨달음이란 특별한 무엇이 아니다. 무지의 장막을 벗고 모든 것이 하나라는 궁극의 지혜를 얻는 것, 이것이 깨달음의 실체이고 이를 통해 자아는 자유와 평온에 이른다.
p387 누구도 자기 뒤통수를 볼 수 없지만, 아무도 그것을 답답해하지 않죠. 우리가 시야의 경계를 보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해의 시야도 마찬가집니다. 내가 어디까지를 이해하는지 그 경계가 보이지 않는 까닭에 우리는 자신의 제한된 이해만으로도 만족스럽게 세상을 해석하며 살아갑니다.
(중략)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떻게 하면 숨겨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까요? 유일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그 텍스트에 대한 선이해입니다. 이것은 아이러니하고 또한 비극적입니다.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미 그 무엇인가를 알고 있어야 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책을 읽음으로써 A 라는 지식을 얻고자 한다면 우리는 이미 자신의 삶 속에서 A에 대해 체험했어야만 합니다.
세상의 모든 텍스트는 우리에게 새로운 지식을 제공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텍스트에서 새로운 지식을 얻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이미 우리가 그 지식에 대해 앞서 이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책은 우리가 알고는 있지만 정리하지 못했떤 것들을 언어화해줄 뿐입니다. 나의 체험을 벗어난 것들은 나에게 체험되지 않습니다.
p389 삶과 죽음을 관통하는 존재가 있다면 어떤 존재인가? 그는 보는 존재입니다. 유일한 관조자. 그는 눈이 필요하지 않고 외부 세계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는 내면을 보는 존재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외부에 있다고 믿어왔던 세계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단지 내 내면의 투영입니다. 물질세계도, 사후세계, 꿈속에서의 세계도 보는 존재로서의 내가, 나의 외부에 있다고 믿는 내 내면의 세계인 것이지요. 이제 더 이상 나의 내적 세계와 외부의 현상 세계는 구분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하나입니다.
p391 그렇다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그래, 알겠다. 내 눈앞의 세계가 실제로는 내 내면의 세계라는 것을 알겠어. 실제로 존재하는 건 관조하는 주체로서의 나뿐이지 , 그렇다고 치자. 그런데 이런 걸 알아서 뭐하나? 왜 내가 이런 걸 알아야 하는 거지? 여러분은 이런 질문에 뭐라고 답하시겠습니까? 우파니샤드는 이렇게 대답합니다. 범아일여의 깨달음이 영원한 자유에 이르게 할 것이다. 그것은 윤회의 고리를 끊고 너를 놓아줄 것이다.
p401 경계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슬픔이 된다. 경계가 없다는 것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경계가 없으면 출구도 없다. 우리는 이 바다를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이 해수면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의 경계도 이와 같지 않을까? 나에겐 경계가 없다. 나는 모든 것에서 이어져 있다. 삶과 죽음에서 내면과 외부에서, 자아와 세계에서 그래서 이것이 슬픔이 된다. 출구는 어디에 있는가? 나라는 구면의 밖으로는 어떻게 나가는 것인가? 하지만 그런 것은 없다. 우리는 이 의식의 지평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우리는 나를 벗어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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