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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하이s] 독서후기_강남의 탄생

24.05.15


책을 읽고 본 내용을 써 주세요. (책의 핵심과 챕터별 요약정리)


1장 왜 투자를 해야 하는가


1. 개발 이전의 강남

지금은 '강남'이라고 부르지만, 예전에는 강남 지역을 영등포와 성동의 중간 지역이라는 의미에서 '영동'이라 불렀다. 당시에는 강북이 서울이자 중심이었다. 강남은 개발 잠재력이 엄청난 땅이었지만, 한강이 큰 장벽이었다. 그러나 1965년 제2한강교가 완공되고, 다리들이 늘어나면서 한강의 지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1960대 서울은 포화 상태였다. 박정희 정권은 국가에 이슈가 발생할 시 피란 부담을 줄이기 위해 강남 개발을 결정했다. 강남의 장점은 개발할 수 있는 부지가 많다는 점, 도심과의 접근성이다. 그 외 강남 개발 이유는 아래와 같다.


<강남 개발>

1) 안보 문제 해결을 위한 도심 기능의 분산

2) 엄청난 개발 가능 면적

3) 개발을 통한 정치자금 조성

4) 서울 도심과의 인접성

5) 자동차 시대의 도래


2. 자동차 시대를 예비하다

경부고속도로의 개통은 전국 일일 생활권 시대를 열었고, 본격적인 자동차 시대를 만들었다. 서울 한정, 강남 지향성이 이때부터 시작됐고, 영동 개발도 이때부터 본경적으로 진행됐다.

제3한강교(한남대교)는 강남의 첫 번째 다리다.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다리지만, 이 다리가 개발될 때 사람들은 별로 관심이 없었다. 이때까지만 해도 그만큼 사람들의 강남에 대한 관심이 적었다. 제3한강교 착공 당시 강남구 신사동 땅값은 평당 200원이었다. 1년뒤 3,000원으로 무려 15개 뛰었다.


3. 강남을 만든 수방 사업

1975년 영동고속도로가 완광되어 고속도로 시대가 열렸지만, 제대로 된 고속터미널은 없었다. 강남고속버스터미널을 1976년 4월 착공했는데, 빠르게 진행되어 9월 1일에 가건물을 올리고 운영을 시작했다. 이때는 수요가 적어 강북에서 출발하고 이곳에 예의상 들렀고, 사실상 버스가 잠을 자는 주차장에 가까웠다. 그래서 정부는 이 터미널을 진짜 터미널로 만들고자 했다. 제대로된 종합터미널-경부선 터미널은 1981년 10월에 완공됐다.


4. 강남 건설

자동차 시대가 열리며 강남이 만들어졌으나, 강남은 지대가 낮아서 자주 물에 잠겼다. 소양강댐 공사는 처음으로 중장비가 동원된 기념비적인 공사였다. 1970년부터 한강 이남에 제방과 강변도로를 건설했다. 10년의 세월에 걸쳐 한강 이남에 제방과 강변도로를 건설했다. 1986년 5월 올림픽대로가 개통됐다. 이로 인해 서울 동서 간 교통이 편리해졌다.

영동 개발은 10여 년 만에 완료되었고, 수서, 잠실, 분당, 판교 개발이 이어지면서 강남은 계속 확장했다. 이런 급속한 건설과 빠른 확장은 경부고속도로 건설의 연장이었다. 한국의 '빨리빨리 정신'이 최대한으로 구현된 지역이다. 강남은 교통량이 많은 도로는 상대적으로 폭이 좁고 높낮이가 심해 사고 위험이 높았다. 당시에는 중장비도 거의 없고 자금도 부족해 요즘 같은 평탄화 작업을 거의 하지 못했다. 그래서 역삼 같은 다른 강남 지역에 고개가 남아있다.

테헤란로는 1977년 6월, 테헤란 시장의 서울 방문을 계기로 서울이 테헤란과 자매 도시가 되면서 테헤란로라는 이름이 붙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화 되자 더 많은 다리가 한강 위에 놓였다. 1979년에 지어진 성수대교에 이르기까지 성산대교를 제외한 모든 다리가 강남에 놓였다. 1970년대 후반 성수대교부터는 경제력에 자신이 생겼고, 미를 추구할만큼 여유가 생겼다. 그래서 성수대교 건설에는 교각 사이를 이전에 비해 2배 이상 넓히는 '거버 트러스 공법'이 도입되었다.

1975년 성동구, 영등포구에서 한 덩어리가 떨어져 나가 강남구가 탄생했다. 이 시기에 강남 이주를 촉진한 하나의 요인은 1975년 4월 베트남 붕괴였다. 한국전쟁이 끝난지 20여 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잠이라, "유사시 한강을 어떻게 건널 것인가?"라는 문제가 걱정거리였다.

1980-1990년대 아파트 시대가 열리며, 많은 기업들이 아파트를 짓고 재벌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1980년대 후반에서 1990년대 사이에 몰락의 길을 걸었다. 결정적 요인은 과다한 부동산 투자와 부채였다. 아파트 건설업체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고 사들인 땅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또 땅을 샀다. 부채로 인한 이자 부담은 안중에 없었다. 땅값은 계속 오르고 아파트는 지으면 팔린다. 이와 같은 환상에 빠져 있었다. 아파트 장사로 쉽게 번 돈을 기업 경재역 강화에 투자하지 않은 탓에 대부분 망했다. 강남은 많은 기업을 성장시켰으나, 오래간 기업은 많지 않다.


5. 명문 학교들의 개척 시대

강남이 현재의 명성을 갖게 된 이유로 명문고 이전이 있다.


과거 5대 공립: 경기고, 서울고, 경복고, 용산고, 경동고

과거 5대 사립: 중앙고, 양정고, 배재고, 휘문고, 보성고


다양한 요인이 있었으나, 정부는 학생들이 혁명을 일으켰을 때의 힘을 신경 쓰고, 강남으로의 고등학교 이전을 실시했다.


대학교의 경우, 강남을 넘어 경기, 지방으로의 이전을 실시했다. 운동권 학생들을 신경쓰고 한 일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지방으로까지 세력을 확대시키게 된 계기가 되었다.


명문학교들이 이전하여 8학군이 형성되었으나, 이것이 바로 강남의 사교육 특구화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전두환 정권의 사교육 억제 정책으로 인해 대학생 몰래 과외가 성행했으며, 이것이 강남 학원 문화의 근원이 되었다.

대치동일대는 1990년초부터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사교육은 재수생 대상이었고, 서울 도심이나 노량진 유명 학원의 대중 강의가 주류였다. 하지만 대치동은 소수를 대상으로 내실 있는 강의와 집중관리를 해주었다. 그러나 이것만이 사교육의 성지를 만든 것은 아니다. 1997년 외환위기가 터지며 회사가 나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개념이 생겼고, 믿을 것은 나 자신 뿐이라며 스펙 과열화를 양상시켰다. 대치동은 현실적 목표, 즉 명문대 진학이라는 해결책을 제시했고, 성과를 냈다. 또한, 수능제도가 생기며, 2001년 불수능 때 서울대 정시모집 합격자 중 대부분이 강남3구에서 나와 강남 아파트값 상승과 학원가 쏠림 현상을 야기했다.


6. 개발 초기의 풍경

고유 명사가 되어버린 '뱅뱅사거리'의 뱅뱅은 1982년 교복 자율화 조치의 시행과 함께 마케팅을 잘해서 명성을 얻었다. 세월이 지나 랜드마크 자리를 내주었지만, 거리 명칭은 사라지지 않았다.


사람이 모이면 그곳이 유행가의 주제 된다. 윤수일의 '아파트', '터미널'은 고향을 그리워하는 곡들이 주름잡던 흐름, 기차라는 주 교통수단의 흐름이 변화했다는 것을 알려주는 곡이기도 했다.


2장 더, 더 커지는 강남


7. 아시안게임과 올림픽, 그리고 잠실

개발 이전의 잠실

서울올림픽이 한국 현대사에 미친 영향은 지대하다. 롯데타운, 대규모 경기장, 아파트(아시아선수촌/올림픽선수촌 아파트)는 강남의 변화와 확장에 크게 기여했다. 예전 잠실은 섬이었다. 1971년 잠실지구 종합개발 기공식 기념 잠실섬은 폭파되었다.



현재 잠실시영 자리는 파크리오가 되었다.



잠실시영아파트가 1975~1976년 건립되었고, 5~6층 규모에 연탄난방 방식이었다.




잠실주공5단지는 달랐다. 1976년 8월 기공되었는데, 23평, 25평으로 당시로서는 대형 평수의 단지였다. 이 단지는 한국 아파트 건축의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에는 고층 아파트가 아이들 정서에 문제가 생긴다는 이유로 '압구정 현대', '은마아파트'가 지어지고 있엇지만, 저층 아파트만 고집되고 있었다(그 결과, 현재 상대적으로 넓은 대지 지분을 갖게 되었고, 금싸라기 아파트로 변모해 먼저 재건축되는 결과를 낳았다.)


지하철 2호선, 강남을 관통하다

2호선은 강남 개발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이다. 1977년 말 서울 인구는 272만 명이었는데, 강북에 489만명, 강남 263만 명이었다. 지하철 2호선 개통 이후 1985년 서울 인구는 964만명. 이 중 강북 522만 명, 강남 442만 명이 되었다. 인구 비율이 65:35에서 54:46으로 바꼈다. 1999년에는 강북 인구는 정체된 반명, 강남은 510만 명으로 늘어 거의 동수가 되었다. 2호선이 강남의 기세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2호선은 유일하게 서울시 지하철 중 확실한 흑자를 내는 노선이다.


아시안 게임, 올림픽, 잠실야구장, 주경기장 등 스포츠가 한국, 서울, 강남에 미친 영향은 엄청났다. 예술의전당과 코엑스는 강남 랜드마크 중 하나다. 하지만 아시안게임, 올림픽이 없었다면 규모가 줄거나 늦게 건축됐을 것이다. 코엑스는 올림픽 직전인 1988년 8월 완공됐다. 아시안게임이 끝나자 1988년 1/1 서울시가 행정구역을 개편함에 따라 송파구가 강동구에서 분리되었다. 선수촌 아파트가 들어서는 지역의 이름은 오륜동이 되었다. 서초구도 강남구에서 분리되었다. 이렇게 강남 3구가 탄생했다.


8. 더, 더 커지는 강남



강남 개발은 잠실을 넘어 수서, 일원 일대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수서 사건'이 발생했다. 수서지구는 결국 한보가 아닌 서울시의 손에서 공영 개발이 실시됐다. 특이한 점은 2천 세대가 넘는 대규모 영구임대주택 단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1990년 초 개포동 영구임대아파트는 택시기사 가족들의 집단 주거지였다. 현재는 그때와 달랐지만, 주차장에 외제차가 거의 없는 이색지대였다. 故 노무현 대통령 아들도 여의도에 전세로 살았지만, 촌티를 벗지 못해 여의도 학생들에게 왕따를 당하고 신길동, 대방동 학생들과 친했다고 한다.


분당신도시 건설

1988년 노태우 정부는 주택 문제를 해결하려 선거공약으로 주택 200만 호 건설을 내세웠고 실행에 옮겼다. 200만 호 중 90만 호를 수도권에 건설할 예정이었는데, 분당, 일산, 중동, 산본, 평촌이 1기 신도시 중심이 되었다. 분당은 5대 신도시 중 가장 넓은 596만 평, 수용인구 39만 명에 약 9만 7500호를 수용하는 초대형 신도시였다. 구성남이 분당보다 먼저 형성되었는데, 산동네에 있는 이유는 서울에서 쫓겨난 철거민들을 수용하기 위해 광주 대단지, 즉 성남 구시가를 만들면서 땅값이 싼 임야를 터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남은 다른 사유로 인해 강북과도 같은 지역이 형성되게 되었다. 지금은 '천당 아래 분당'이지만, 초기 입주자들에게 분당은 살기 힘든 곳이었다.


9. 강남의 부촌들

1. 압구정동

압구정동은 강남에 생긴 첫 번째 부촌이고 한국 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친 곳이다. 압구정 현대아파트 일대는 장마 때마다 침수되는 배나무 과수원골이었다. 압구정 현대는 최초로 회사 이름을 아파트에 붙인 단지다. 압구정 현대의 특징은 거의 모든 동이 남향 원칙을 따르고 있다. 그래서 거실에서는 앞쪽 아파트를 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북쪽에 벽을 뜯고 큰 창을 내기도 했다. 한국 건설 가장 큰 문제는 습식 건축을 지나치게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구성 저하와 새집 증후군이 많다. 대다수 건물들ㅇ느 세월이 지나면 타일이 떨어지고 외장재가 흉한 몰골을 드러낸다.

1980년대 중반부터 유명 패션숍, 미용실, 모델 에이전시, 광고 제작사, 이벤트 회사, 사진 스튜디오가 들어서기 시작하며 압구정동은 단순 부촌에서 한국 사회를 주도하는 소비 공간으로 진화했다. 하지만 2000년대 들어 압구정로데오거리는 급속하게 퇴쇠됐다. 1990년대 압구정동은 '오렌지족'의 무대로 유명해졌다.

압구정동의 특징 중 하나는 많은 금융기관이 있다는 점이다. 그만큼 경제력을 알 수 있다. 별도의 경비실을 두고 외부인 통제를 시작한 단지도 압구정동이 처음이었다.


2. 서초동

서초1동에는 빨간색 벽돌로 지은 고급 단독주택과 빌라들이 마을을 이루고 있는데 법조계 인사들이 많이 산다고 한다. 서초 2동에는 2007년부터 입주가 시작된 삼성타운이 자리 잡고 있다. 서초3동에는 2003년 10월부터 입주 시작된 현대슈퍼빌이 있는데, 군인공제회가 건설해서 예비역 장성ㅇ들이 살고 있다. 서초4동에는 삼풍아파트와 삼풍백화점 자리에 세워진 주상복합 아크로비스타가 자리 잡고 있다.


3. 청담동

압구정동이 강남의 구세대를 대표한다면, 청담동은 신세대를 대표한다. 청담동은 고층 대단지가 없다는 게 매력이 되어서 뜬 동네다. 뷰티숍도 많고, 연예기획사도 몰려있다. 도산공원은 900만 평에 달하는 영동지구 개발 당시 유일한 계획공원이다.


4. 삼성동

강남의 업무 기능 지구는 강남역 사거리와 역삼동 일대, 선릉과 삼성동 일대가 양대 산맥이다. 삼성동 쪽에서 일하는 직장인 연봉이 삼성 본사를 제외한 강남역쪽 직장인들보다 높다고 한다. 저자는 앞으로 업무 중심은 강남역쪽에서 삼성동쪽으로 더 기울 확률이 높다고 말한다. 한국전력 부지에 현대자동차가 고층 빌딩을 짓고, 다른 회사들도 이전하게 되면 부지가 더 넓어지고, 잠실종합운동장 유휴 공간까지 연계해 개발하면 시너지 효과가 더 커질 거라는 것이다.


10. 강남의 허파들

봉은사



봉은사는 통일신라 시대 견성사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 선릉을 지키는 능찰역할을 했고, 지금보다 선릉에 더 가까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강남 개발 당시 대치동 입구까지 땅이 전부 봉은사 소유였다고 한다.


선정릉


서울특별시 강남구 삼성동에 있는 조선시대 왕릉군(群)으로, 조선 제9대 왕 성종과 성종의 계비 정현왕후가 함께 잠든 선릉(宣陵)과 조선 제11대 왕 중종이 안장된 정릉(靖陵)을 합쳐 부르는 말이다. 선정릉이라는 말 외에도 삼릉(三陵)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현재 사적 제19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유네스코 공인지정 세계문화유산이다.


인헌릉과 대모산

선릉 주위에 룸살롱이 많다면 헌릉 앞에는 국정원이 있다. 헌릉은 서초구에 있지만 선릉과는 달리 아주 한적한 곳에 있다.

대모산은 옛날에는 개포동과 일원동 주민들에게 땔감을 제공한 산이다. 20세기에는 무연고자나 노숙자들의 시신이 많이 묻히기도 했다.


청계산과 우면산

청계산


우면산

청계산과 우면산은 관악산 줄기지만 '강남'에 있는 덕분에 다른 대접을 받는다. 예전에는 산 취급도 못 받았으나, 지금은 강남 주민들의 휴식처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다.




양재천


양재천은 청계천과 달리 지나치게 인공적이지 않다. 1970년대 개포지구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물길이 직선화되어 인의적으로 탄천에 합류되었다. 예전에는 백로가 자주 날아들어 학탄(학여울)이라 했다. 그러나 강남권이 개발되며 주택가에서 나오는 생활하수로 양재천은 심하게 오염되었다. 이에 1995년 7월부터 양재천 살리기 운동이 시작됐다. 현재 양재천에는 2급수에 사는 어류가 많이 서식하고 있다.


도산공원

도산공원은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 정신과 교육 정신을 기리고자 조성된 공원이다.


11. 지난날의 그늘

제3한강교(한남대교) 건설과 함께 개발되기 시작한 강남은 한국 땅 투기의 발원지였다. 그 전에는 땅 투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말죽거리 지역은 복덕방 촌을 이뤘다. 1966년 초 평당 200~400원이던 말죽거리 땅값은 1968년 말 평당 6,000원으로 뛰었다.

강남 부동산은 왜 이렇게 강력할까? 첫째, 강남 부동산 소유자들이 정부 정책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둘재, 빈부 격차의 심화는 곧 높은 진입장벽을 만들고, 그들만의 천국으로 구조화된다. 셋째, 강남은 현대판 '계급 세습 구조'를 확실히 구축하고 있다. 현실적으로 금수저를 재생산하는 두 축은 부동산과 교육이다. 여전히 강남에 진입하려는 수요가 많은 상황, 강남거주자들의 권력과 경제력이 있는 한 강남은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 같다.


끊어진 다리 : 성수대교

김영삼 대통령 시절, 대형 참사가 많았다. 삼풍백화점과 성수대교 참사다. 1994년 10 월 21일 성수대교 붕괴 사고가 터졌다. 성수대교 붕괴는 외국 언론도 부실시공의 표본으로 크게 보도했다. 사후 수습도 엉망이었다. 이후 점검한 15개 한강 다리 모두 결함이 발견되어 재시공을 했다.


무너진 백화점: 삼풍백화점 참사

1995년 6월 29일, 서초동 삼풍백화점 건물 2개 동 가운데 하나가 무너졌다. 여러차례 건물에서 붕괴 신호가 있었으나 이를 무시하고 영업을 강행했고 이는 502명 사망, 937명 부상이라는 해방 이후 최대의 참사를 낳았다. '불법과 탈법' 자체였던 삼풍백화점은 구조 작업도, 시민의식도 문제가 많음을 보여주었던 사건이었다. 그 자리에는 아크로비스타를 건설하여 주상복합 건물을 짓고 참사를 빨리 잊게 했다.


룸살롱

1972년 서울시장은 강북 840만 평을 '특정 시설 제한구역'으로 묶어, 강북 억제책을 폈다. 이는 곧 강남 개발 촉진책이었다. 이에 따라 도시의 기능이 변했다. 강북의 바, 카바레, 술집 등이 강남으로 옮겨갔다. 이때부터 '호스티스'가 1970년대 대중문화를 지배하는 코드가 되었다. 강남 개발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시기와 맞물려 룸살롱의 황금기가 시작됐다. 3S 정책과 에로비디오의 대중화가 겹쳐 룸살롱은 더 호황을 맞았다. 1986년 삼저 호황이 겹치면서 테헤란로와 강남로는 룸살롱, 안마시술소, 카바레, 호텔 등이 성황했다. 살인사건도 많이 일어났고, 호빠가 성행했다. 룸살롱 문화는 여전히 건재하고 강남이 그 중심에 있다.


12. 현재의 강남

1960~1970년대에 지어진 아파트들은 대부분 5층 이하였고, 엘리베이터가 없었다. 모두 계단실을 두는 계단실형으로 지어졌다. 잠실주공5단지는 엘리베이터가 도입됐다. 엘리베이터를 건물 중앙에 배치하고 양쪽으로 복도를 놓는 중복도 방식이 도입됐다. 이 방식은 동선을 집약시켜 공간을 효율적으로 이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ㅇ있다.

1980년대 중반까지 고층 아파트는 30평형 이하는 복도형, 40평형 이상은 계단실형을 채택했다. 그 이후에는 30평대 내외도 계단실형으로 지어졌다. 입주자의 경제력이 향상되면서 엘리베이터의 유지, 관리비용을 감당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말에 조성된 상계 신시가지 아파트에서 여러 변형이 나타났고, 1997년부터 정부거 정책적으로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 혹은 아파트 건설을 지원하면서 타워형 아파트가 대세가 되었다.

1997년 7월 대림 아크로빌 분양 이후 주상복합 열풍이 불었다. 약 10년 동안 한국 부동산 시장을 흔들었다. 이 열풍의 중심은 도곡동 타워팰리스다.

1997년 말 IMF 이후, 경제, 부동산이 얼어붙었다가 회복됐다. 1970~1980년대 건설된 10평대 주공아파트와 일부 민간 건설사가 지은 아파트의 재건축 소식이 들리기 시작했다. 2003년 은마아파트, 2004년 잠실주공아파트로 이어지며 재건축 확정, 예정 아파트 가격이 폭등했다. 재건축 아파트 가격은 다른 지역 아파트보다 1.5배 넘게 뛰었고, 재건축 시장이 과열되자 정부가 나섰다. 2003년 523 대책을 내놓으며 재건축 아파트에 대해 후분양제를 실시했고, 9월 5일에는 분양권 전매 금지 및 건설 예정 가구의 50% 이상을 전용면적 25.7평 이하로 짓도록 의무화했다. 2006년 3우러 위헌 시비까지 낳은 재건축 초과이익 환수 제도로 절정에 달했다.

재건축 아파트 시대와 더불어 우리말이나 한자어 아파트 이름들이 사라졌다 .근대화 이후 한국 사회의 모든 분야는 일본 영향을 받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촌동 한강맨션이 성공하자 아파트에 국적 불명 외국어들을 갖다 붙였고, 서울시는 1976년 아파트 이름에 외국어 사용을 금지시켰다. 그래서 한국어 이름들이나 건설사 이름을 썼다. 이런 경향은 2000년대 초반에 사라졌다. 2001년 반포주공 2단지 재건축 시공사로 삼성물산이 선정되면서, 래미안으로 대표되는 아파트의 브랜드화가 시작되었다.


성형수술의 메카

강남에는 성형외과가 성업 중이다. 외국 언론에서도 한국 성형 문화가 종종 언급된다. 1990년대 들어 서울의 경제적, 사회적 패권이 강남으로 넘어가면서 명동과 신촌에 있던 기존의 성형외과들이 강남으로 옮겨갔다.


황금노선 또는 지옥철: 지하철 9호선

대부분 민간 투자 사업의 경우 교통 수요를 과다 예측하는 경우가 많다. 최소 운영수입보장에 의해 민간사업자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9호선은 예측 통행량이 과소하게 계산된 특이 사례였다.강서구 마곡지구와 김포신도시로 인한 수요 증가를 반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민간 사업자가 비용 절감을 위해 전동차 4량만 운영했고, 증차를 결정했어야 할 2011년에는 오세훈 시장 때문에 의사결정이 미뤄졌다.


13. 서울시 도시기본계획과 강남

강남은 1970년대 영동개발을 통해 계획도시의 면모를 갖췄다. 그러나 그린벨트 훼손이 우려됐고, 무분별한 도시 확장을 억제할 필요성이 제기됐다. 서울시는 1981년 처음 도입된 도시기본계획 제도가 법정 계획으로 정립된 후, 1990년에 목표 연도 2000년을 기준으로 최초의 서울시 도시기본계획을 수립했다. 이후 1997년과 2006년에 재정비를 거쳐 3차례 도시기본 계획을 수립했고, 2014년에 4번째 서울플랜을 수립했다.

강남은 박원순 서울시장이 주도한 2030서울플랜에 이르러 부도심 딱지를 떼고 도심으로 승격했다. 국제 업무 중심지다. 2030서울플랜은 기존의 1도심 체제를 3도심체제로 개편한다.


3장 강남들


14. 작은 강남들

여의도: 강남의 원조

국회, 방송국, 대기업 보사, 많은 금융기관을 거느린 여의도는 사대문 안, 강남과 함께 서울의 3대 중심지다. 강남 개발의 모델이자 효시. 여의도 개발은 1966년 서울 대홍수를 계기로 추진됐다. 수해를 방지하는 한편, 택지를 조성하고 신도시를 개발했다. 여의도가 천지개벽 수준으로 태어나는 동안 밤섬은 다른 운명을 맞이했다. 1968년 밤섬은 폭파됐다.

여의도는 본격적으로 고급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선 첫 지역이다.

굵직한 기관들이 여의도에 들어서면서 여의도는 한국 중심 중 하나가 되었다. 여의도 출퇴근 인물들은 방송(연예), 금융, 정치 분야이기 마련이데 공통점은 정보가 빠르다는 것이다. 아파트의 노후화로 많은 집주인들이 목동, 강남, 분당으로 떠나고 전세를 준 경우가 많다.


노원: 강북의 '실패한 강남'

서울 일자리는 기존 중심가와 여의도 일대, 강남의 3대 중심에 몰려있다. 노원구에는 별다른 일자리가 없다. 가장 큰 원인은 1980년대 노원 개발에 들어갔지만 아파트만 지었기 때문이다.대표적 단지가 중계지역이다.


목동: 강서의 '성공한 강남'

목동은 여의도와 더불어 한국 방송의 중심지이고, 서울 서남권에서는 가장 부유한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목동 개발은 비행기에 탄 외국인들에게 판자촌을 보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실행되어 이렇다 할 개발이념이 없다.


15. 강남의 영향

자동차 시대에 잃어버린 것들

강남 탄생의 가장 큰 계기 중 하나가 자동차 시대의 도래다. 심리적, 문화적 측면에서 자동차 시대가 우리 생활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까? 자동차 시대가 한국 경제에 큰 힘이 디었다는 사실을 부정할 수 없고 사교육을 비롯한 한국 사회의 문제를 강남과 자동차가 전부 책임져야 한다는 것도 아니지만 자동차로 인해 잃어버린 것들도 생각해보고 과연 한국의 자동차문화가 정산인지 고민해야겠다.


강남에 역전당한 강북: 뉴타운 재개발 문제

주거환경의 불균형은 한강이남 이북의 불균형이로 이어졌다. 서울시는 뉴타운 계획을 발표하여 왕십리, 은평, 길음 등 3개 시범 뉴타운 사업구를 지정했다. 뉴타운의 문제점은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더불어 드러났다. 생활권 단위의 정비 개념을 도입하여 광역 기반 시설의 확대를 지향했디만 짧은 시기에 많은 지역을 지구로 지정하다보니 '생활권 계획'이 아니라 '광역 정비 사업'으로 변질되었고 사업 중단의 원인이 되었다.



논의하고 싶은 점


📕74p. 승승장구하던 이 기업들이 몰락한 이유는 무엇일까? 기업마다 몰락의 계기는 달랐으나 결정적인 요인은 같았다. 과다한 부동산 투자와 부채였다. 아파트 건설업체는 사실상 아무런 규제를 받지 않은 채 사들인 땅을 담보로 은행돈을 빌렸고 그 돈으로 또 땅을 샀다. 부채로 인한 이자 부담은 안중에 없었다. -> 과거의 사례로 미루어보아 대기업들도 흥행할 때, 상승장에서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고 무리하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파트 분양으로 흥한 대기업들이 투자로 인해 돈을 많이 번 상황에서, 무리하지 않고 가진 것들을 지켜내려면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대응했어야 망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요?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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