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만 많던 내가 긍정의 신호탄을 쏘게 됐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별명이 '여자 노홍철'일 정도로 긍정적인 사람이었다.
모든 해보는 거야! 가는거야! 하는 느낌으로 정말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현실의 결과는 생각보다 참혹했다.
다른 집안과 달리 형제가 많아 빨리 철이 들었던 것 같다.
대학을 보내려면 부모님이 많이 힘들 것 같아서 특성화고에 들어갔고 은행원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선배가 제1금융권에서 부도덕한 사건이 있어 연대책임으로 3년간은 우리학교에서 제1금융권은
못간다고 했고 그래서 대학교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대학교때부터 알바와 과외를 많이 했다.
점심도 사실 친구들과 먹고 싶었지만 그 시간에도 초등학교 급식알바를 해서 공짜로 끼니를 해결하면서
돈을 벌 수 있음에 행복하고 감사했다.
사실 집안형편이 어렵진 않았지만 나까지 4명을 대학까지 보내야하는 부모님이 버거울 것 같아서
어떻게든 장학금을 타고 용돈을 벌었던 것 같다.
그렇게 24살 1월에 대학원과 직장을 모두 다 합격했을 때도 난 역시 직장을 선택할 수 밖에 없었다.
항상 하고 싶었던 것 보다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고 싶었다.
그런데 어느날, 착한 딸이 지치는 날이 왔다.
옛날 부모님과 같이 우리 부모님은 첫째에게만 집을 해주셨다.
첫째가 잘되야 나머지도 다 잘된다는 철학이 있으셨다.
그런데 내가 그렇게 악착같이 모아도 안모이던 돈이 그 집이 코로나 시기에 4배까지 뛰는걸보니
형제인데도 배가 아팠다.
사실 회사생활도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다.
생각보다 억울한 일에 이를 하도 악물어서 어금니가 깨지고
잇몸도 내려앉아서 마우스 피스를 하고 보톡스까지 맞아야했는데
오빠는 가만히 앉아 돈을 버는 것 같았다.
그렇게 긍정의 아이콘이었던 내가 점점 부정적으로 바뀌어갔다.
그렇게 나만 왜?? 라는 생각이 많아졌던 시기에 결혼을 했다.
연애 9년차에 한 결혼이었지만 코로나시기에 해서 많은 축복 속에서도 결혼식을 하지 못했다.
100명 인원제한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그때 또 욕심이 났다. 천정부지로 오른 집값으로 인해서 더이상 집을 못살 것만 같았다.
그래서 이번 기회가 아니면 살 수 없을 것 같은 집을 '영끌'해서 사게 되었다.
하지만 역시 신은 내 편이 아닌 것 같았다.
꼭지, 상투잡았단 말을 내가 상투를 잡고 나서야 알게되었다.
그렇게 나는 부정의 아이콘이 되어가고 있을 때, 월부를 만나게 되었다.
주우이님의 강의를 보면서 느낀점은 좋은 시기란 언제든 있어보였다.
그 시기를 내가 깨닿는지 아닌지가 제일 중요한 거라고 생각되는 강의였다.
지금처럼 주우이님이 부자가 된건 하루 아침일거라고 생각한건 오산이었다.
하루씩 자기만의 속도대로 하나하나 한채한채 늘려갔던 것 이었지 돈이 많아서
목좋은 자리에 하나 사서 10-20억이 한번에 오른 케이스가 아니였다.
발로 뛰고, 또 뛰어서 앞마당 하나씩 늘려서 얻은 결과셨다.
그래서 와닿았던 강의였다.
내가 과연 부자가 될 수 있을까?
이제 늦지 않았을까?
하지만 강의에서 솔루션도 간단히 말씀해주셨다.
돈이 좀 있다면 수도권을 투자하고
돈이 없다면 지방에 투자하라.
사이클이 있어 무조건 수도권만 오르는 것도 아니였다.
그리고 질문들도 하나같이 나를 지켜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상황이 내 상황을 보여주는 것 같은 질문들로
주우이님이 그 질문들에 대답을 해 주실때마다 사이다를 마시는 기분이었다.
이 첫강의는 나도 부자가 될 수 있을까의 물음표로 시작해
나도 부자가 될 수 있다는 느낌표로 끝내주는 강의였고
그렇게 다시 긍정의 신호탄을 쏘게 해준 강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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