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년 가을.
당시 저는 수원시 영통에 위치한 200세대 조금 넘는 신축 아파트에 실거주하고 있었습니다. 이 아파트가 특이했던 게 아파트 이름에는 영통이라는 지명이 붙어 있지만 사실은 영통과는 거리가 먼 비역세권 아파트였습니다. 당시 저희 집은 탑층의 동향이었는데 집에서 보이는 뷰에 보이는 공간이 커다란 논이었기에 나름 뷰가 괜찮았던 기억이 나네요.

이 정도까지는 아니지만;;
넓은 들판에 눈이 소복이 쌓여 있거나 초록빛 식물들이 펼쳐져 있으니 자연이 관리해 주는 공원을 내 집 앞마당처럼 쓴다는 기쁨에 퇴근하고 얼른 집 와서 밖을 쳐다보는 것이 낙이었습니다.
하지만 수도권 부동산 시장은 수도권의 그렇게 드넓은 빈 평지땅을 가만히 두지 않았어요. 어떻게든 아파트 한동이라도 더 올려야 한다는 강박이 있는 것인지 저의 낙이었던 그 논에는 어느샌가 포클레인이 들어와서 땅을 고르고 풀을 베고 있었습니다.
회사에 가서 동료들에게 이런저런 일들로 아쉽다는 이야기를 하며 수도권 부동산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보니 몇 분의 선배님들께서는 최근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말과 함께 본인들도 영통을 떠나 수지나 분당으로 이사 가려고 한다는 말들을 전해왔었습니다.
부서의 어떤 선배는 그 무렵 시중의 은행들이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2억 원의 신용대출을 해준다고 하며 본인도 은행 신용대출을 받아 상급지로 갈아타기 준비를 하고 있다는 말까지 나오니까 마음에 조급함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나도 이 집을 팔면 한 1억 정도 남으니까
00 은행에서 2억 대출받고
새로 이사 갈 집에서 담보대출을 받으면 광교나,
용인 수지 정도는 이사 갈 수 있지 않을까?
신분당선이 그렇게 좋다는데
부동산 시장에 대해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단순히 생각하고 먼저 집을 팔아야 그 돈으로 새로운 곳으로 이사를 갈 수 있다는 생각에 토요일 아침 부동산에 찾아가 덜컥 집을 내놓았습니다. 어디로 이사 가야 할 지도 정하지 않은 채
당시 제가 살던 집은 동향이라 해가 잘 들지 않는 데다가 탑층이라는 비선호적 요소가 있었기에 시중의 호가보다는 좀 낮춰서 내라는 주변 사람들의 말에 시세보다 500만 원 정도 싸게 내놓았더니 1시간 만에 부동산에서 전화가 와 손님이 보러 온다는 전화를 받게 되었습니다.
"손님이 보러 오신데요! 집에 계세요?"
"아 막 나가려던 참인데. 지금 오실까요?"
"아주머니 한 분인데 지금 올라갈게요!"
그리고 바로 한 아주머니가 5살 정도 되는 아이의 손을 잡고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우리 집으로 왔습니다.

이런 모습이었다.
탑층이긴 하지만 도배도 그럴듯하게 해 놓고 당시에는 사람들이 잘하지 않던 줄눈에 탄성코팅 시공 등을 해놓은 집이다 보니 손님의 눈에도 깔끔하게 보였나 봅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온 아주머니는 이리저리 휘적휘적 둘러보시고는 부동산 사장님과 함께 나갔습니다. 그리고 당연히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아, 아이랑 함께 실거주할 집을 보러 다니시는구나.
우리 집이 실거주하기에 딱 좋지!"
아주머니가 집을 보고 10분이 지났을까, 부동산에서 바로 전화가 왔습니다.
"좀 전에 보고 가셨던 손님이 500만 원만 더 깎아주면 하시겠대요! 대신에..."
"대신에요?"
"20년 2월까지 3억 3천만 원에 전세입자를 구해서 팔아달래.
이 사람이 그러니까 갭투자자예요. 이런 경우가 잘 없는데 어쩌죠?"
정말 신기했습니다. 아이를 데려온 게 같이 살 집을 구하러 온 게 아니라 그냥 아이랑 같이 온 것일 뿐이고 이 집에 들어와서 살겠다는 게 아니라 전세입자를 맞춘 갭투자를 하려 하시는구나!
하지만 동향/탑층에 살면서 상급지로의 이사가 간절했던 나로서는 빠르게 이 집을 매도하는 것이 우선이었기에 그 조건을 받아들이기로 했습니다.
"제가 전세 맞춰놓을게요. 계약하시죠."
부동산을 아무것도 모르는 초짜가 고수에게 완벽히 당하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생각해 보면 정말 아찔했던 특약을 계약서에 집어넣고 마는데 바로 이것입니다.
"매도자는 20년 2월까지 3억 3천만 원의 2년 신규 전세를 세팅하고 매도한다.
만약 해당 기간까지 전세계약이 되지 않을 경우 본 계약은 무효이다."
정말 아무것도 몰랐던 저는 집이 팔렸다는 기쁨에 계약서에 도장을 찍고는 겨울 내내 열과 성을 다해 갭투자자의 전세를 맞춰주기 위한 노력을 다했고 결국 3억 2천800만 원에 신규 전세를 세팅하고는 매도 계약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저희 집을 매수했던 아이의 손을 잡고 왔던 그 아주머니는 그 집을 매수한 지 9개월 만에 약 1억 원의 시세차익을 보고 그 집을 매도했습니다.

실패든 성공이든 반드시 어떤 결과에 대한 복기를 해보기로 했습니다.
분명한 것은 저도 이 집을 분양받아 들어왔으니 거주하는 동안 약 1억 원의 차익을 얻어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주변 말만 듣고 어떤 동네의 어떤 집을 살 것인지 정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집을 매도한 것은 이후에 엄청 힘든 결과로 다가왔습니다.
또한 저희 집이 다른 집에 비해 약간의 비선호 요소(탑층, 동향)가 있다는 생각에 무조건 싸고 빠르게 팔아야 한다는 조급함이 있었는데 그런 마음을 고수 투자자한테 들켰던 것도 문제였습니다. 고수 투자자는 저의 그런 행동을 보고 말도 안 되는 특약까지 제시하며 본인이 유리한 고지를 점했으니 말입니다.
가장 큰 문제는 제가 초보였고, 부동산 공부가 제대로 되지 않았었기 때문에 저희 집의 가치가 현재 시장에서 어느 정도인지를 파악하지 못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희 집을 시세보다 엄청 저렴하게 내놓았고 그 가치를 정확히 꿰뚫어 본 투자자는 빠르게 들어와서 단기간에 고수익을 내며 EXIT 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던 경험이었습니다..
정리해 보면
- 협상 테이블에 앉았다면 절대 나의 조급함을 보이면 안된다.
- 상대방이 급한 사정이 있다면 최대한 나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서 제시해야 한다.
- 상승장엔 300세대가 안 되는 단지, 탑층의 동향이어도 거래가 된다는 사실이다.
- 부동산 공부를 철저히 해서 그 자산이 가진 가치를 정확히 파악해야 한다.
이런 점들을 깨달을 수 있었던 부동산 초보 시절의 아찔한 경험담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