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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적한투자] 독서후기 #25-12-1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25.12.06

 

 

죽음의 수용소에서 독서 후기

25.12.02 적적한투자

 

l  ​책 제목(책 제목 + 저자) : 죽음의 수용소에서

l  저자 및 출판사 : 빅터 프랭클 / 청아 출판사

l  읽은 날짜 : 2025. 12

l  핵심 키워드 3가지 뽑아보기 : # 삶의 목적 # 희망 # 로고테라피

l  도서를 읽고 내 점수는 (10점 만점에 ~ 몇 점?) : 10점

 

 

[본 것 / 깨달은 것(파란 글씨)]

 

[추천의글]

삶에 목적이 있다면 시련과 죽음에도 반드시 목적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어느 누구도 그 목적이 무엇인지 말해줄 수 없다. 각자가 스스로 찾아야하며, 그 해답이 요구하는 책임도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게 해서 만약 그것을 찾아낸다면 그 사람은 어떤 모욕적인 상황에서도 계속 성숙해나갈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프랭클 박사는 다음과 같은 니체의 말을 인용한다.

'왜why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실존주의 중심적인 주제와 만난다. 즉 산다는 것은 곧 시련은 감내하는 것이며, 살아남으려면 그 시련속에서 어떤 의미를 찾아야 한다는 것. 어떻게하면 환자들에게 상황이 아무리 참담해도 무언가를 위해 자기 삶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을 깨우쳐 줄 수 있을까? 이와 관련해 프랭클 박사는 자신이 직접 강제수용소 동료들을 대상으로 했던 집단치료에 얽힌 감동적인 이야기를 들려준다.

>> 저자는 정말 끔찍했던 수용소에서의 삶의 경험을 통해, 정말 많은 시련의 상황, 어려운 상황에서 꺠달은 내용들에 대해서 설명을 해준다. 시련 속에서 배울 수 있는 것, 삶에서 온전히 나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것, 그리고 나의 삶에 대해 어떤 책임을 져야하는지, 그 경험을 통해 내가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깊이 있게 고민해볼 수 있는 질문을 던져 주었다. 이 질문은 ‘튜터’ 의 삶의 방향성에 대해서도 고민해볼 수 있는 바탕이 되는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상상이 잘 되지 않는 부분이지만, 극한의 환경까지 몰아부치는 수용소의 환경에서는 무엇이든 가능했다. 모두 발가벗고 모든 털이 깎인채로 함께 생활했다. 초라한 옷, 부족한 수면 시간, 불편한 수면 장소 등 모든 것이 ‘이건 불가능해’라는 영역 속에 놓여졌다. 저자의 말 중에 “물론입니다.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방법에 대해서는 묻지 말아 주십시오” 라는 말이 있다. 극한까지 밀어부치고 싶진 않지만 그렇게 하면 적응을 하게 된다는 것.

 

>> 이건 정말 불가능해라고 생각이 들정도로 묘사가 되는 수용서의 환경, 하지만 그곳에서도 사람은 적응할 수 있다는 것을 보면서, 어떤 도전에 대해서 ‘나 스스로 너무 안 된다고 한계를 두고, 적응할 수 업을 것이라고 단정짓고 있지는 않는가?’ 라는 생각도 들었다. 기안 84의 마라톤에 나오는 장애인 분의 마라톤 영상, 그리고 최근 마라토너의 아침 훈련 영상들을 보며, 모든 것은 핑계라는 것까지도 생각이 닿게 되는 것 같다.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아무리 감정이 무뎌진 수감자라도 할지다로 분노를 느끼는 순간이 있음을 말하기위해서이다.

그 분노를 육체적인 학대와 고통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으면서 느끼는 모멸감에서 나오는 것이다.

>> 이 대목을 보면서 느꼈던 것은 육체와 마음은 분리되어 있다는 것이다. 육체는 아무리 힘들어도 참을 수 있지만, 마음이 힘든 것은 참기 힘들다는 것, 그리고 마음을 건드릴 때는 반응을 한다는 것, 핵심은 마음이라는 것을 생각하게 된다. 튜터 활동을 하실 때도 아무리 힘들어도 마음이 곧게 서 있으면 문제 될 것이 없다는 것이 생각나며, 체력적 힘듬 보다, 마음적 가치를 따라가는 것의 중요성을 다시금 생각하게 된다.

 

[인간의 정신적 자유]

수용소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지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볼때,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보이는 심리적 반은응 어떤 물리적 사회적 조건에 대한 단순한 표현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수면부족과 식량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이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예스키가 이런말을 한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예스키의 이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 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있고 목적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이다. 자기 자신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는 본인이 선택한다는 것이다. 또한, 내 삶 뿐만 아니라, 고통, 시련들까지도 내가 그것의 가치를 어떻게 결정할지는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영혼의 자유라고 이야기 해주는 것이 인상 깊었다.

 

내가 생각하는 가치관에 대해, 스스로 명확하게 생각하고 정리하고 이야기할 수 있다면, 그것이 본인이 정한 삶의 방향성이자, 답이라는 생각이 든다. 고통스러운 과정 또한 그것을 성장의 과정으로 볼지, 고통스러운 결과로 볼지는 그 사람의 그릇과 역량, 목표하는 바의 높이에 따라 달라짐

 

‘한 사람의 그릇의 크기’라는 말이 생각난다. 똑 같은 과정, 결과를 마주하더라도 그것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지가 중요하며, 그것을 결정하는 것은 그 사람이 원하는 목표의 수준에 따라 달라진다고 생각한다. 그릇의 크기는 그 사람이 원하는 목표의 크기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련의 의미]

시련은 운명과 죽음처럼 우리 삶의 빼놓을 수 없는 한 부분이다. 시련과 죽음 없이 인간의 삶은 완성될 수 없다. 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 김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일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 위 인간의 정신적 자유, 삶의 가치, 시련의 의미를 생각하는 방향은 그 사람의 목표의 크기에 따라서 달라진다. 시련 역시 그 안에서 어떤 것을 배울 수 있을지는 그 사람이 결정하는 것이다.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생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지나쳐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라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는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물론 아주 극고수의 사람만이 이렇게 위대한 영적인 고지에 오를 수 있다.

하지만 몇몇 사람들은 세상일에서의 실패와 죽음을 통해서도 이런 위대함을 성취할 수 있는 기회를 갖는다. 그들은 평범한 환경에서는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그런 위대한 성취를 이루어 낸다.

>> 수용소에서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사용할 수 있다는 관점, 이는 그 시련이 끝이 아니라, 그 뒤에 더 큰 나만의 목적, 목표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이는 평범한 환경에서는, 휘몰아 치지 않는 환경에서는, 나의 극한의 상황에 도달해보지 않고서는 격어보지 못하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든다.

 

극한의 상황, 엄청 바쁜 일정, 그 속에서 사람은 진실의 순간을 마주한다는 생각이 든다. 몸도 마음도 편한 상황에서는 진실의 순간을 마주하기 어렵다. 평범한 환경에서는 도달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에서만 마주하는 진실의 순간들을 하나씩 넘어갔을 때, 더 단단해지고,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것에서 중요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들을 구분할 수 있는 것들을 쌓아간다는 생각이 든다.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내가 이 경우를 통해 관찰하고 도출해 낸 결론은 후에 수용소 주치의에게 들었던 말과도 일치했다. 그의 말에 의하면 1944년 성탄절부터 1945년 새해에 이르기까지 일주일간 사망률이 일찍이 볼 수 없었던 추세로 급격히 증가했다는 것이다. 주치의는 이 기간에 사망률이 증가한 것은 보다 가혹해진 노동 조건, 식량 사정 악화, 기후 변화, 새로운 전염병 때문이 아니라고 했다.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소식이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중 많은 사람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사람이 왜 사는지 ‘목적’이 있다면 어떤 고난도 겪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 보아온(나로서는 읽어온)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가 어던 태도를 가지는지에 따라 선택이 혹은 미래가 달라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살아야 할 이유, 그것이 바로 인간의 원동력.

 

>> 이 부분에 대해서 정말 많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다. 처음 투자 공부를 시작했을 때는 ‘경제적 자유’를 바라면서 시작했지만, 어느 순간 이제 경제적 자유는 이렇게 그대로 하기만 한다면, 충분히 이룰 수 있구나, 배운대로 투자하고, 시간을 기다리면 경제적 자유는 이루겠구나 라는 생각이 들고, 그 다음 은퇴를 생각했을 때, 나는 진짜 행복한가?에 대한 고민이 이어졌던 것 같다.

 

그리고 멘토, 튜터님들을 보았을 때 어떻게 경제적 자유를 이루고도 저렇게 다른 분들을 위해서 살아가실까? 에 대한 고민을 해보면, 단순 경제적 자유의 너머에 있는,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서 오는 행복과, 그 안에서 본인들만의 자아를 성취해나가는 것에서 정말 높은 행복감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중 가장 위에 위치한 ‘자아실현’의 욕구에서 오는 행복이 있다는 것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고.. 그 행복에 대해 깊게 고민해보게 된 것 같다.

 

나누는 것, 다른 사람들을 돕는 것에서 오는 행복에 더해, 자아 실현을 할 수 있는 기회를 갖추는 행복, 그것이 멘토 튜터님들이 생각하시는 진정한 행복이지 않을까? 정말 힘든 상황에서도 계속해서 이어나가실 수 있는 원동력이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해방의 체험]

만약 수용소에 끌려간 후, 자유를 맞이하면 어떨까? 너무 상식적인 반응은 ‘기뻐한다.’이다. 우리도 그렇게 알고 있고. 저자는 그 감정에 대해 이야기 한다. 내가 과연 지금 해방 이후 기쁜것이 맞는지, 기쁨을 누리고 있는게 맞는지 그렇게 바로 와닿지 않아 한다는 것. 하지만 일정 시간 이후 ‘안도감’이 들기 시작하면 굶주렸던 몸은 먹기 시작하고, 답답했던 입은 풀린다. 해방이란게 뭘까? 그 해방이 주는 기쁨이 진짜 우리가 생각하는 것 만큼 기쁨만 가득한걸까? ”파랑새는 없다.” 라는 말이 계속 생각난다. 과연 내가 부를 이루고 난 다음의 모습이, 내가 생각하는 그렇게 기쁜 모습일까. 내가 너무 꿈을 꾸는건 아닐

 

​>> 생각해보면, 정말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학교 일정 후 오는 방학기간 중, 2~3일 정말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있을 때 오는 것이 안도감은 되지만, 진짜 행복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본인의 삶의 의미가 없고, 그저 편안하기만 하다면, 불행할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부를 이루고 난 다음의 내 모습, 은퇴하고 난 다음의 내 모습이 그저 누워서 쉬는 여생이라면 그게 진짜 기쁜 모습일까? 에 대한 고민은 해보아야한다고 생각된다

 

[삶의 의미]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코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시련의 의미]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라 고통을 피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데 있다는 것은 로고 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은 기꺼이 그 시련은 견디는 것도 바로 이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수 있는 시련인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할 의미있는 행동이다.

>> 삶의 의미를 찾는 과정에서 반드시 시련이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말이 위로가 된다. 와이에 대해 이야기를 할 떄 많은 선배님들이 어려웠던 과거, 힘들었던 과거에 대해서 이야기 해주시지만, 나는 그런 과거가 없었기에 제대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지 않을까? 생각이 되었다.

하지만 본질은 내가 삶의 의미를 스스로 잘 정의를 할 수 있다는 것이지, 반드시 시련을 겪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며, 피할 수 있고, 경험하지 않아도 깨달을 수 있다면 원인은 제거하는 것이 의미있는 행동이라는 말이 위안이 된다.

 

 

 

 

[논의할 점]

- '왜why 살아야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how 상황도 견딜 수 있다'

 

→ 저자는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어떤 상황도 살아낼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있습니다. 삶의 의미가 인간에게 얼마나 강한 생존의 동력이 되는지를 보여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튜터를 꿈꾸는 과정에 있는 저희는 각자 어떤 삶의 목적을 가지고 에이스 활동을 해나가고 있는지 함께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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