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드라마 속 상위 1% 부자들은 대개 불행하게 나옵니다.
펜트하우스의 야경이 내려다보이는 집에 살지만
가족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수백억 자산을 가졌지만 매일 권력 다툼에 시달리며,
원하는 건 뭐든 살 수 있지만 정작 진심으로 웃는 장면은 드물죠.
드라마가 우리에게 반복해서 보내는 메시지는 하나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라고.
그런데 솔직히 한 번쯤은 이런 생각을 해본 적이 있으실거예요.
저 불행, 나라면 기꺼이 감수하겠다고.
강남 펜트하우스에 살면서 저 정도 고민이라면,
해볼 만하지 않겠느냐고.
드라마는 극적 재미를 위해 부자의 불행을 과장합니다.
시청자의 위화감을 줄이기 위해
혹은 권선징악의 서사를 위해 돈 많은 사람은
어딘가 결핍되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이야기가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현실은 드라마가 아니다.
"돈이 많다고 꼭 행복한 건 아니잖아요."
주변에서 한 번쯤 들어봤을 말입니다.
이 문장에는 묘하게 위안이 담겨져 있습니다.
내가 지금 넉넉하지 않아도,
부자들이라고 특별히 더 행복한 건 아니라는 이야기.
어딘가 공평한 것 같고, 어딘가 따뜻하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이 말을 하는 사람들 중
실제로 그 돈을 가져본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상위 1% 부자들의 행복은 어떨까요?
2010년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
대니얼 카너먼과 앵거스 디턴은
흥미로운 연구를 발표했습니다.
미국인 약 45만 명을 대상으로
소득과 행복의 관계를 분석한 결과
연간 소득 약 7만 5천 달러(당시 한화 약 8천만 원)를 기점으로
일상적인 행복감의 증가가 멈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연구는 꽤나 큰 반향을 일으켰습니다.
“역시 돈이 전부가 아니야”
"일정 수준이 넘으면 돈보다 관계가 중요해" 등의
다양한 해석이 당시에 쏟아졌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 연구를
마치 과학적 면죄부처럼 받아들였습니다.
지금 내 월급이 그 수준에 못 미쳐도,
더 많이 벌지 않아도 행복엔 크게 지장이 없다고.
이 믿음은 10년 넘게 유지됐습니다.
2021년, 매슈 킬링스워스는 같은 질문을 다시 물었습니다.
방법은 달랐습니다.
스마트폰 앱을 통해 수만 명의 사람들에게
하루에도 여러 번 실시간으로 행복도를 측정했습니다.
결과는 앞서 언급한 카너먼의 연구와 달랐습니다.
행복은 소득이 높아질수록 계속해서 올라갔습니다.
7만 5천 달러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10만 달러에서도, 20만 달러에서도 꾸준히 상승했습니다.
임계점 같은 건 없었습니다.
두 연구의 충돌은 주목을 받았고
2023년 두 연구자는 결국 함께 데이터를 재분석했고
결론은 이랬습니다.
행복과 소득의 관계는 단일하지 않다는 것이었죠.
무슨 말이냐면 이미 불행한 상태에 있는 저소득층에게는
돈이 강력한 해결책이 됩니다.
그리고 이미 행복한 고소득층에게도
소득이 늘어날수록 행복은 지속해서 높아집니다.
어느 쪽이든, 돈이 행복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믿어온 것보다 훨씬 크다는 이야기입니다.
특히 주목해야 할 건 아래 그래프의 왼쪽 끝입니다.

저소득 구간에서의 불행 강도는 압도적입니다.
단순히 행복이 조금 낮은 게 아닙니다.
선택지가 없다는 것, 늘 아슬아슬하다는 것, 아파도 병원을 망설인다는 것
그 무게는 돈이 있는 사람이 상상하는 것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돈이 많다고 행복한 건 아니야"라는
말은 왜 그토록 쉽게 나올까요.
아마도 그 말을 하는 사람 대부분이
'돈 없는 불행'은 경험해봤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돈 있는 행복'은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직접 경험하지 못한 것에 대해
인간은 쉽게 부정적으로 단정 짓는 경향이 있습니다.
특히 그 단정이 현재 자신의 상황을
위로해주는 방향이라면 더욱 그렇죠.
두 세계의 차이는 생각보다 비대칭적으로 큽니다.
돈이 없어서 오는 불행은 구체적이고 일상적입니다.
이달 카드값이 걱정되어 잠을 설치는 것,
아이 학원을 보내고 싶지만 망설이는 것,
조금 더 나은 선택을 할 수 있는데
돈 때문에 포기하는 것.
반면 돈이 있어서 오는 행복은 단순한 물질적 풍요가 아닙니다.
선택할 수 있다는 자유,
시간을 살 수 있다는 여유,
관계에서 돈 계산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편안함 등..
이것들은 경험해보지 않으면 실감하기 어렵습니다.
"돈이 전부가 아니다"라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 말이 돈 없는 삶의 고통을 가볍게 여기거나
더 나은 삶을 향한 의지를 낮추는 방향으로 쓰인다면
반드시 경계해야 합니다.
돈이 행복에 중요하다는 걸 인정했다면
이제 다음 질문이 옵니다.
어떻게 그 돈을 만들고, 또 지킬 것인가.
이 질문에는 한 가지 불편한 진실이 따라붙습니다.
열심히 일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됐다는 것입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돈의 양이 계속 늘고 있기 때문입니다.
코로나 이후 각국 정부는 전례 없는 규모로 돈을 풀었고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한국의 광의통화(M2) 증가율은 같은 시기
미국의 두 배 수준인 8.5%를 기록했습니다.

돈이 많이 풀린다는 건
같은 금액의 돈이 살 수 있는 것이 줄어든다는 의미입니다.
통장 잔고는 그대로인데
그 돈의 가치는 조용히 사라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최근 추경 소식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최근 정부는 중동전쟁 대응을 명목으로
26조 2천억 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해
국회를 통과시켰습니다.

이재명 정부 출범 이후 두 번째 대규모 추경입니다.
지원금과 에너지 보조, 민생 안정을 위한 지출 자체를
무조건 비판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재정지출이 반복될수록
시중에 풀리는 돈의 양은 늘어나고
그 부담은 결국 인플레이션이라는 이름으로 돌아옵니다.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오겠습니다.
드라마 속 상위 1%부자들은 정말 우리보다 덜 행복할까요?
돈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돈이 없으면 행복하기 훨씬 어렵습니다.
그리고 돈이 많을수록 행복도 함께 높아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현실의 상위 1%는 화면 밖에서
드라마보다 훨씬 조용하고
훨씬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경험해보지 않은 채 "돈 많아도 불행하던데"라고 단정 짓는 것.
바로 그것이 경계해야 할 함정입니다.
돈이 많아도 불행할 수 있습니다. 그건 맞습니다.
하지만 돈이 없어서 오는 불행의 무게와
돈이 있어서 누리는 행복의 크기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비대칭적입니다.
그리고 그 돈을 지키는 일 역시
생각보다 훨씬 적극적인 태도를 필요로 하는 시대가 됐습니다.
행복이 돈으로만 오지 않는 건 맞습니다.
하지만 돈 없이 행복하기란, 그리고 그 돈을 지키기란
생각보다 훨씬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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