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겉모습이 거의 같은 아파트 두 채가 있습니다.
같은 시기, 거의 붙어 있는 땅 위에 올라갔습니다. 평형도 비슷하고, 창밖 풍경도 닮았습니다.
그런데 한 채는 23억. 바로 옆 한 채는 12억.
차이는 11억입니다.
같은 시간을 흘려보냈는데, 왜 이렇게 벌어졌을까요.
답은 단순합니다.
한쪽은 ‘내 집’이었고, 다른 한쪽은 ‘빌린 집’이었습니다.
요즘 서울 강일동이 시끄럽습니다.
이곳에는 서울시가 무주택 시민을 위해 만든 장기전세, 이른바 '시프트' 단지가 있습니다.
주변 시세보다 훨씬 낮은 보증금으로 최장 20년 거주를 보장하는 제도입니다.
2007년 무렵, 많은 가구가 이 약속을 믿고 강일동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당시에는 더없이 합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적은 돈으로 새 아파트에 살 수 있었으니까요.
그렇게 20년이 흘렀습니다.
그사이 단지 시세는 12억 안팎까지 올라섰습니다.
바로 옆, 분양으로 산 단지는 23억을 넘겼습니다.
그런데 만기가 다가오자, 전혀 다른 풍경이 펼쳐집니다.
20년을 산 전세 세대가 손에 쥐고 나갈 수 있는 돈은 보증금 3억 남짓.
이 돈으로는 살던 단지에 다시 들어가는 일조차 불가능합니다.
집값은 분명 올랐는데, 그 상승분은 단 한 푼도 거주자의 몫이 아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마주하는 진실이 있습니다.
임대로 사는 동안,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습니다.
"나랑은 상관없는 남의 동네 일"이라고 넘기기 쉽습니다.
저도 한때 그렇게 생각했습니다.
전세나 월세로 깔끔하게 사는 편이 영리하다고 믿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목돈을 묶지 않고, 좋은 동네를 골라 다니면 된다고요.
생각이 바뀐 건 아이가 생기고 나서입니다.
아이가 다닐 학교, 아이가 기억할 동네.
'언제든 나가야 할 수도 있는 곳'에서 그 모든 걸 세우는 일은 생각보다 무거웠습니다.
숫자도 저를 흔들었습니다.
지난해 발표된 가계금융복지조사를 보면, 순자산 상위 20% 가구와 하위 20% 가구의 격차는 사상 최대로 벌어졌습니다.
상위 20%의 평균 순자산은 15억을 넘긴 반면, 하위 20%는 1132만원에 그쳤습니다.
세대별 흐름은 더 뼈아픕니다.
집을 사기 어려운 39세 이하 청년층의 평균 순자산은 오히려 1년 전보다 줄었습니다.
같은 기간 40대와 50대의 순자산은 늘었습니다.
자산 형성이 힘든 청년층만 자산이 역주행한 셈입니다.
이 격차를 가른 결정적 변수가 무엇이었을까요.
대부분 ‘집을 가졌느냐, 아니냐’였습니다.
실물자산의 70% 이상을 부동산이 차지하는 구조에서, 자가 보유 여부가 곧 자산 격차로 이어진 것입니다.
강일동은 이 거대한 흐름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준 한 장면일 뿐입니다.
오해는 마세요.
저는 임대가 무조건 나쁘다고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임대에는 분명한 '빛'이 있습니다.
임대의 빛
☑️ 적은 돈으로 좋은 입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 목돈과 대출 부담을 덜 수 있습니다.
☑️ 직장, 학교 사정에 맞춰 유연하게 움직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이 빛이 '지금 당장'에만 비춘다는 점입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빛 뒤에 가려졌던 그림자가 길어집니다.
임대의 그림자
☑️ 집값이 올라도 그 이익은 집주인 또는 국가의 몫입니다.
☑️ 계약이 끝나면 내가 가꾼 자리에서 떠나야 합니다.
☑️ 20년을 성실히 살아도, 내 자산은 출발선 근처에 그대로 멈춰 있습니다.
저는 이 차이를 이렇게 정리합니다.
임대는 ‘주거’를 해결합니다.
내 집은 '주거'와 ‘자산’을 동시에 지킵니다.
집 한 채가 거주의 안정과 자산 형성이라는 두 방패를 동시에 들어주는 셈입니다.
임대는 그중 하나만 막아줍니다. 그것도 계약 기간 동안만요.
제가 늘 마음에 새기는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자산은, 내가 자는 동안에도 일을 합니다.
내 집을 가진 사람은 출근해 일하는 동안 집도 함께 일합니다.
물가가 오르면 집의 가치도 따라 오릅니다.
반면 임대로 사는 동안에는, 오르는 가치가 전부 남의 통장으로 흘러 들어갑니다.
20년이라는 시간은 누구에게나 똑같이 주어졌습니다.
다만 그 시간을 ‘내 자산이 일하는 시간’으로 쓴 사람과,
‘남의 자산을 키워주는 시간’으로 보낸 사람의 끝은 11억만큼 갈렸습니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싶은 게 있습니다.
집을 고를 때 저는 여러 가지를 보지만 크게 두 가지를 더 살펴봅니다.
환금성
내가 떠나고 싶을 때, 제값에 팔고 나올 수 있는가
수요의 힘
사람들이 계속 살고 싶어 하는 자리인가
이 두 가지가 받쳐주는 집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든든한 방패가 됩니다.
오를 때는 함께 오르고, 흔들릴 때는 덜 흔들립니다.
내 집을 갖는다는 건 단순히 '내 명의의 부동산'을 갖는 일이 아닙니다.
시간을 내 편으로 만드는 일입니다.
같은 해, 같은 동네에 두 가족이 자리를 잡았다고 해봅시다.
소득도, 출발선도 거의 같았습니다.
한 가족은 약간의 대출을 안고 작은 집을 샀습니다.
다른 가족은 더 좋은 집을 빌려 깔끔하게 살았습니다.
처음 몇 년은 빌려 산 가족이 더 여유로워 보였습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지금.
산 가족은 대출을 거의 다 갚았고, 집은 그들의 든든한 자산이 되어 있습니다.
아이는 한 동네에서 친구를 사귀고, 추억을 차곡차곡 쌓았습니다.
빌려 산 가족은 계약이 끝날 때마다 짐을 쌌습니다.
지금은 다시 갈 곳을 찾고 있습니다.
저는 우리 아이에게 떠나지 않아도 되는 자리를 물려주고 싶습니다.
그 마음이 결국, 제가 '내 집'을 포기하지 않는 가장 솔직한 이유입니다.
강일동의 풍경은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20년 뒤, 당신은 어느 쪽에 서 있을 건가요.
거창한 결심은 필요 없습니다.
지금 당장 집을 사라는 말도 아닙니다.
다만, '소유의 영역'을 단 한 칸이라도 만들어가는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일. 그것이 첫걸음입니다.
오늘 할 수 있는 작은 시작.
☑️ 내가 지금 사는 집의 '주거 비용'과 '자산 가치'를 분리해서 적어보기
☑️ 5년 안에 닿을 수 있는, 환금성 좋은 한 채의 후보 동네를 정해보기
☑️ 그 한 채를 위해 매달 떼어둘 금액을 오늘 정해보기
작아도 좋습니다.
중요한 건 방향입니다.
남의 자산을 키워주는 시간에서, 내 자산이 일하기 시작하는 시간으로.
그 방향만 잡아도, 20년 뒤의 풍경은 완전히 달라집니다.
오늘이 그 시간을 내 편으로 돌려세우는 첫날이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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