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스4반 멤생이] 인간관계론을 읽고

19시간 전

 

인간관계론 을 읽고

 

 

비난은 아무런 쓸모가 없다. 사람들을 방어적으로 만들고, 스스로를 정당화하도록 만들기 때문이다. 비난은 위험하다. 사람들이 소중히 여기는 자부심에 상처를 입히고, 자존감을 훼손하며, 적개심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일단 당신이 먼저 완벽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네 집 문 앞이 더러운데, 이웃의 지붕에 쌓인 눈에 대해서 불평하지 마라.”

 

→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며, 남을 향한 비난보다 먼저 나 자신을 비춰보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느꼈다. 내가 정말 이 말을 할 자격이 있는 사람인지, 내가 지적하려는 그 모습을 나 역시 반복하고 있는 건 아닌지부터 먼저 돌아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해질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자는 뜻은 아닐 것이다. 다만 내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을 인정한 상태에서, 정말로 받아들일 준비가 된 사람, 그리고 스스로 원해서 도움을 구하는 사람에게 건네는 솔직한 피드백은 여전히 큰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비난이 아니라, 함께 나아가기 위한 제안으로 말할 수 있다면 말이다.

 

인간 본성의 가장 깊은 충동은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라고 말했다. 이 표현을 기억하라.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이다. 우리의 업적, 우리의 욕구에 대해 생각하는 걸 잠시 멈추기로 하자. 다른 사람의 장점을 이해하려 노력해 보자. 아첨 따위는 잊어버리자. 정직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정을 해 주기로 하자. “다른 사람을 솔직하게, 진심으로 인정하고 칭찬하라.” 그러면 사람들은 당신의 말을 소중하게 받아들이고, 평생에 걸쳐 그 말을 보물처럼 여기고 반복할 것이다.

 

→ 나는 이 문장을 읽으면서, 사람에게 가장 깊은 곳에 있는 욕구가 ‘중요한 사람이 되고 싶은 마음’이라는 사실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생각해보면 나 자신도, 주변 사람들도 결국은 “나는 소중한 존재야”라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애쓰고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나의 업적, 나의 욕구에만 몰두하기보다, 잠시 멈추고 눈앞의 사람을 ‘중요한 사람’으로 대하는 태도가 얼마나 큰 힘을 갖는지 돌아보게 되었다.

아첨이 아닌, 정직하고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인정과 칭찬은 한 사람의 마음에 아주 오래 남는다는 문장이 특히 마음에 남았다. 언젠가 내가 무심코 건넨 한마디가 누군가에게 평생 기억될 수도 있다는 걸 생각하면, 앞으로는 내 말 한마디에 더 책임감을 갖고 싶어진다. 상대의 장점을 찾고, 그 사람 안에 있는 ‘중요한 사람이 되고픈 욕망’을 따뜻하게 어루만져 주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된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가장 커다란 문제와 마주치고, 다른 사람에게 가장 커다란 피해를 끼치는 사람들이다. 그런 사람들로부터 인류의 가장 커다란 폐해가 생겨난다.

→ 이 문장을 읽으면서, ‘관심 없음’이 단순히 성격 문제나 취향의 문제가 아니라는 걸 다시 느꼈다. 다른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의 마음과 상황, 필요를 보지 않겠다는 선택과도 같고, 그 결과가 나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는 모습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뉴스를 통해 보는 많은 비극들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출발점에는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나는 ‘잘해주자’보다 한 단계 더 내려가, 최소한 무시하지 않는 태도, 한 번쯤 더 물어보고 들어보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떠올리게 된다. 거창한 선행이 아니어도, 내 주변 사람들에게 관심을 기울이는 작은 습관들이야말로 큰 폐해를 막는 첫걸음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만일 그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라면 나폴레옹은 더 많이 노력했다. 혼자가 되면, 나폴레옹은 그 사람의 이름을 종이에 쓰고 쳐다보며 집중해서 그 이름을 완전히 머리에 새기려 했다. 그 다음엔 종이를 찢었다. 이런 식으로 그는 다른 사람들의 이름을 귀로 각인시키기도 하고, 눈으로 각인시키기도 했다. 이 모든 것은 시간이 필요하다. 하지만 에머슨에 따르면 “훌륭한 예절은 사소한 것을 희생할 때 이루어진다.”

→ 이 부분을 읽으면서, ‘상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일’이 단순한 기억력 싸움이 아니라, 관심과 노력을 쏟는 행위라는 걸 다시 느꼈다. 나폴레옹이 혼자 있는 시간에까지 종이에 이름을 적고, 바라보고, 찢어가며 외웠다는 건 결국 “당신은 나에게 중요한 사람입니다”라는 메시지를 몸으로 증명한 거잖아. 나도 누군가가 내 이름을 정확히 불러줄 때 이상하게 마음이 열렸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반대로, 이름을 계속 틀리게 부르거나 아예 기억조차 못 할 때 느꼈던 서운함도 함께 떠올랐다.

 

특히 “훌륭한 예절은 사소한 것을 희생할 때 이루어진다”는 말이 오래 남는다. 그 사람의 이름을 한 번 더 확인해보고, 메모해두고, 기억하기 위해 일부러 시간을 쓰는 건 겉으로 보기엔 정말 사소한 수고다. 하지만 그런 ‘사소한 것’을 기꺼이 희생하고 시간을 내주는 순간, 그건 더 이상 사소한 행동이 아닌 것 같다. 나도 앞으로는 대화의 내용만큼이나, 함께 이야기하는 사람의 이름을 제대로 부르고 기억하는 데 더 정성을 들여보고 싶다.

 

“미움으로는 절대 미움을 끝낼 수 없다. 사랑으로만 미움을 끝낼 수 있다.” 오해는 절대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 요령이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하지 않으면서 그 마음을 달래는 재주가 있어야 하고, 다른 사람의 관점에서 공감하며 문제를 보겠다는 욕망이 있어야 한다.

→ 이 문장을 읽으면서, 미움이 쌓이는 많은 순간들이 사실은 ‘이기고 싶어서’ 혹은 ‘억울해서’ 더 크게 번져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움을 미움으로 되갚으려 할 때는 잠깐 속은 시원할지 몰라도, 결국 관계는 더 멀어지고 나중에 돌아보면 후회만 남았던 것 같다. 그래서 진짜 용기는 따지고 이기는 데서가 아니라, 먼저 한 번 내려놓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해보는 데서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오해는 절대로 말싸움으로 끝나지 않는다”는 문장이 마음에 남았다.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말의 힘으로 상대를 눌러 이기는 게 아니라, 요령 있게 표현하고, 상처 주지 않으면서도 할 말은 하는 기술, 그리고 무엇보다 상대의 관점에서 공감해보려는 마음이 필요하다는 걸 느꼈다. 앞으로는 감정이 먼저 튀어나오는 순간일수록, 한 번 더 숨을 고르고 “지금 이 사람은 어떻게 느끼고 있을까?”를 먼저 떠올리는 연습을 해보고 싶다.

 

이미 19세기 전에 예수는 말했다. “너와 다투는 사람과 급히 화해하라” 다시 말하자면, 고객이나 배우자, 입장이 다른 상대방과 논쟁하려 들지 마라. 그가 틀렸다고 말하지 마라. 그를 흥분시키지 마라. 사람을 다루는 수완이 필요하다. 예수가 태어나기 2천 2백 년 전에 이미 이집트 왕 악토이는 아들에게 현명한 충고를 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에게 해 주고 싶은 충고이다. 악토이 왕은 4천 년 전 어느 날 오후 술을 마시는 중에 말했다.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래야 얻을 게 있을 것이다.”

→ 나는 이 내용을 읽으면서, ‘논쟁에서 이기는 것’과 ‘관계를 지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라는 걸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상대가 틀렸다는 걸 논리적으로 증명해내는 순간, 머리로는 내가 이긴 것 같지만, 마음으로는 둘 다 상처 입고 끝나는 경우가 너무 많았던 것 같다. 예수가 말한 “너와 다투는 사람과 급히 화해하라”는 말은, 결국 옳고 그름을 따지기 전에 관계를 먼저 돌보라는 초대처럼 느껴졌다.

특히 “다른 사람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마라. 그래야 얻을 게 있을 것이다.”라는 악토이 왕의 충고는 너무 단순해서 오히려 더 강하게 다가왔다. 순간적인 이김을 선택하면 내 자존심은 세워질지 몰라도, 결국 잃는 게 더 많았다는 경험을 떠올리게 된다. 앞으로는 상대를 흥분시키고, 기분 상하게 만들면서까지 내 의견을 관철시키려 하기보다, 한 번 더 부드럽게 말하고, 감정을 다치게 하지 않는 방향으로 표현하려는 연습을 하고 싶다. 사람을 다루는 수완이라는 것은 거창한 기술이 아니라, 결국 “이 말이 저 사람에게 어떻게 들릴까?”를 한 번 더 생각해보는 태도에서 시작된다는 걸 배운 느낌이다.

 

우리가 옳을 때는 부드럽고 요령 있게 동의를 얻으려고 노력하자. 솔직히 말해보자면 우리는 놀라울 정도로 틀릴 때가 훨씬 더 많다. 그럴 때는 빠르고 분명하게 우리의 실수를 인정하도록 하자. 이 방법은 놀라운 결과를 낳기도 하고, 못 믿을 수도 있겠지만 상황에 따라서는 자신을 옹호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도 하다. 옛 속담을 기억하라. “싸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은 많지 않다. 하지만 양보하면 생각보다 훨씬 많은 것을 얻는다.”

→ 이 문장을 읽으면서, ‘옳은 말을 어떻게 하느냐’가 ‘무엇이 옳으냐’만큼 중요하다는 걸 다시 느꼈다. 내가 옳다고 확신하는 순간일수록 목소리가 더 커지고, 표정이 굳어지고, 상대를 설득하기보다는 눌러버리려 했던 때가 떠올랐다. 사실 내가 완전히 옳았던 순간보다, 나중에 돌아보면 내가 틀렸던 순간이 훨씬 많았다는 것도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앞으로는 옳다고 믿을수록 더 부드럽게, 요령 있게 동의를 얻으려는 쪽으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특히 틀렸을 때 “빠르고 분명하게” 실수를 인정하는 태도가 오히려 더 많은 걸 가져다준다는 부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보통은 나를 변명하고 방어해야 안전할 것 같지만, 경험상 솔직하게 “제가 잘못 봤어요”라고 인정했을 때 관계가 더 단단해지는 순간들이 있었다. 싸워서 이겨서 얻는 건 생각보다 별로 없고, 한 발 양보했을 때 돌아오는 신뢰와 여유가 훨씬 크다는 걸 기억하고 싶다. 앞으로는 이기려는 말보다, 양보함으로써 더 많은 것을 얻는 말을 연습해보고 싶다.

 

 


댓글


자유부자
18시간 전N

튜터님, 또 독모에서 만나고 싶네요 😊 너무 좋은 독모였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