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
이 책은 사실 행복의 기원을 읽고, 행복을 진화론적으로만 해석하려는 저자에 대한 약간 반항심 그리고 내 생각을 뒷받침해줄 행복에 대한 책을 찾다가 우연히 발견했다(더 신기한 것은 월부 게시판에 21년에 이 책을 읽겠다고 적어놓은 내 글을 발견했다는 점도 신기. 안 읽고 뭐했니?).
여튼, 아주 강한 목적성을 가지고 이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대 성공이었고, 막연한 내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던 좋은 기회였다.
행복의 기원을 조금 드라이하게 정리하면, "사람은 그냥 동물이야. 생존과 번식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행복"이라는 이름 아래 교묘하게 설계되어 있을 뿐이야. 결국 행복은 생존과 번식을 위한 행동/욕구임을 일단 이해하고, 오히려 그걸 잘 이용(행복압정, 빈도>강도, 외향성 등)하면 효과적으로 행복하게 살 수 있어"이다.
반면, "죽음의 수용소에서"라고 번역된 이 책의 진짜 이름은 "MAN'S SEARCH FOR MEANING" 그리니깐 "삶의 의미에 대한 연구(?)"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을 행복의 기원과 대비되는 점을 강조하여 극단적으로 요약하면, "사람은 (동물이 아니다) 실존적이면서 주관적(독립적)으로 시련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고 그래야 행복할 수 있어"이다. 너무나도 대비되는 책이다. 저자는 책의 약 50%를 수용소에서의 시련에 대해 적었는데, 처음에는 왜 그랬나 싶었으나, 저자는 수용소의 실상을 가능한 모두 전달하여,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극단적인 환경에서도 번식/생존만을 위해 행동하지 않고 실존적으로 주관적으로 시련을 극복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앞서 적은 행복의 기원에서도 내 의견을 밝혔지만 뭐가 맞다 틀리다라기보다 행복을 보는 관점을 2개의 책을 통해 구체화하고 입체적으로 볼 수 있다는 측면에서 2권의 책 모두 소중하다. 적응하기 쉬운 다소 간단하게도 확보 가능한 행복은 사실 그리 멀리 있지 않고 굉장히 기술적으로 확보가 가능하다. 이를 마다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내 생각에 궁극적인 행복은 그것만으로 채워지기 어렵다 생각한다, 사람에 따라 다르겠지만. 이 책에서 말하는 실존적이면서 주관적인 면에서 행복을 보자면, 결국 사람은 삶의 의미를 찾게 마련이고, 이는 사람마다 모두 다를 수 밖에 없으며 내면보다는 직면한 외부에서 찾아야 하는데, 이는 내가 삶에서 찾는 것이 무엇이냐보다는 삶이 나에게 무엇을 요구하는지를 이해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정말 중요하다. 왜냐하면, 그게 바로 실존적이면서 주관적으로 행복할 수 있는 나만의 유일한 이유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런지는 더 살아봐야 알겠지만 말이다.
이 책을 추천해주신 월부에게 감사합니다.
하기는 이 책에서 인상깊은 구절들을 가져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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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00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그때 한 가지 생각이 내 머리를 관통했다. 생애 처음으로 나는 그렇게 많은 시인들이 시를 통해 노래하고, 그렇게 많은 사상가들이 최고의 지혜라고 외쳤던 하나의 진리를 깨달았다. 그 진리란 바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추구해야 할 궁극적이고 가장 숭고한 목표라는 것이었다. 나는 인간의 시와 사상과 믿음이 설파하는 숭고한 비밀의 의미를 간파했다.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을 통해서, 사랑 안에서 실현된다.’
그때 나는 이 세상에 남길 것이 하나도 없는 사람이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생각하며(그것이 비록 아주 짧은 순간이라고 해도) 여전히 더할 나위 없는 행복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극단적으로 소외된 상황에서 자기 자신을 적극적으로 표현할 수 없을 때, 주어진 고통을 올바르고 명예롭게 견디는 것만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일 때, 사람은 그가 간직하고 있던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생각하는 것으로 충족감을 느낄 수 있다. 내 생애 처음으로 나는 다음과 같은 말의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
‘천사들은 한없는 영광 속에서 영원한 묵상에 잠겨 있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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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정신적 자유)
강제 수용소 수감자들이 지니고 있던 전형적인 심리적 특징에 관한 문제를 정신 의학적인 측면에서 소개하고, 정신 병리학적으로 설명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독자들은 인간이 철저하게 그리고 필연적으로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는 존재라고 생각하게 됐을 것이다.이런 경우 주변 환경이 수용소 생활의 유일한 구조가 되며, 이것이 수감자들에게 일정한 유형의 행동을 하도록 강요한다.
하지만 인간의 자유는 어떤가? 어떤 주어진 환경에 대한 사람들의 행동과 반응에 아무런 정신적 자유도 없단 말인가? 우리가 믿고 있는 이론, 즉 인간은 여러 조건과 환경적인 요인─ 생물적, 심리적, 사회적 성격으로 이루어진 ─이 만들어 낸 하나의 피조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 정말로 사실일까? 인간은 이런 여러 요소들에 의해 우연히 만들어진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강제 수용소라는 특별한 상황에서 수감자들이 보인 반응이 ‘인간은 주변 환경의 영향을 피할 수 없다’라는 이론을 입증해 줄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그런 환경에 직면한 인간에게는 자기 행동을 선택할 자유가 없단 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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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론은 물론, 내가 직접 체험한 것을 통해서도 나는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내릴 수 있다. 수용소 체험으로 나는 수용소에서도 사람이 자기 행동의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것을 입증해 주는 예(이런 이야기는 종종 영웅적인 성격을 띠게 되는데), 즉 무감각 증세를 극복하고 불안감을 제압한 경우는 얼마든지 많이 있다. 가혹한 정신적, 육체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에서도 인간은 정신적인 독립과 영적인 자유의 자취를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징기생각]
행복의 기원 덕분에 사람을 마치 강아지처럼 비유하시는 진화론적 주장으로 마음이 많이 상했는데, 이 책을 읽고 치유 중이다. 물론 극단적인 상황을 예로 든 것이긴 하지만, 행복의 기원도 마찬가지지 않던가(최근 자모님도 행복의 기원을 언급하셔서 내가 뭘 잘못 읽었나 싶기도 합니다만)
결국 인간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고, 아무리 진화론을 들이밀어도 인간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신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무리 번식과 생존이 중요해도 말이다.
아직 읽는 중이지만, 이 내용이 이 책의 중반부터 나오기 시작하여, 저자가 왜이리 수용소의 힘든 상황을 주구장창 50%에 가까운 지면에 설명하고 있는지 사실 불만이었다가 이제 이해가 된다.
이런 상황을 이해해야 저 말을 더 현실적으로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선택은 과연 자유의지였을까? 아니면 결국 번식과 생존을 위한 선택이었을까? 아니면 복합적인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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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자기 운명과 그에 따르는 시련을 받아들이는 과정, 다시 말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나아가는 과정은 그 사람으로 하여금 자기 삶에 보다 깊은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폭넓은 기회─ 심지어 가장 어려운 상황에서도 ─를 제공한다. 그 삶이 용감하고, 품위 있고, 헌신적인 것이 될 수 있다. 아니면 이와는 반대로 자기 보존을 위한 치열한 싸움에서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잃고 동물과 같은 존재가 될 수도 있다. 여기에 힘든 상황이 선물로 주는 도덕적 가치를 획득할 기회를 잡을 것인가 아니면 말 것인가를 결정하는 선택권이 인간에게 주어져 있다. 그리고 이 결정은 그가 자신의 시련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드느냐 아니냐를 판가름하는 결정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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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런 종류의 사람들은 이것이 단지 예외적으로 어려운 외형적 상황일 뿐이며, 이런 어려운 상황이 인간에게 정신적으로 자기 자신을 초월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는 사실을 종종 잊어버린다. 수용소의 어려운 상황을 자기 정신력을 시험하기 위한 도구로 이용하는 대신 스스로의 삶을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무런 성과도 없는 그 어떤 것으로 경멸한다. 그들은 눈을 감고 과거 속에서 사는 것을 좋아한다. 그런 사람에게 인생은 의미 없는 것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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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야할 이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수용소에서 사람의 정신력을 회복시키려면 그에게 먼저 미래에 대한 희망을 보여 주는 데 성공해야 한다. 니체가 말했다.
‘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딜 수 있다.
(중략)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과제들, 즉 삶의 의미는 사람마다 다르고, 때에 따라 다르다. 따라서 일반적인 방식으로 삶의 의미를 정의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삶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한 대답은 포괄적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삶’은 막연한 것이 아니라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삶이 우리에게 던져 준 과제가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바로 이것이 개개인마다 다른 인간의 운명을 결정한다. 어떤 사람, 어떤 운명도, 그와는 다른 사람, 그와는 다른 운명과 비교할 수 없다. 똑같은 상황이 되풀이되는 경우는 하나도 없으며, 각각의 상황은 서로 다른 반응을 불러일으킨다. 때로는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이 그에게 스스로의 운명을 개척하기 위해 행동에 들어갈 것을 요구할 수도 있다. 반면 어떤 때에는 더 생각할 시간을 갖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게 이롭다고 생각하게 할 수도 있다. 때로는 주어진 운명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가야 할 때도 있다. 각각의 상황들은 그 나름대로 독자성을 갖는다. 그리고 어떤 상황에서 비롯된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언제나 가까운 곳에 단 하나만 있는 법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시련을 겪는 것이 자기 운명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그는 그 시련을 자신의 과제, 다른 것과 구별되는 자신만의 유일한 과제로 받아들여야 한다. 시련을 당하는 중에도 자신이 이 세상에서 유일한 단 한 사람이라는 사실에 감사해야 한다. 어느 누구도 그를 시련으로부터 구해 낼 수 없고, 대신 고통을 짊어질 수도 없다. 그가 자신의 짐을 짊어지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은 그에게만 주어진 독자적인 기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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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시련이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가 명백하게 밝혀지면서 우리는 수용소 안에서 자행되는 폭력을 무시하거나 거짓 상상을 하거나 억지로 만들어 낸 낙관적인 생각을 즐기는 것으로 그것이 주는 고통을 감소시키려는 시도를 하지 않게 됐다. 시련으로부터 등을 돌리기를 원하지 않았다. 시련 속에 무엇인가 성취할 수 있는 기회가 숨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릴케가 <우리가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라는 시를 쓴 것도 아마 시련 속에 이런 기회가 숨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릴케는 마치 ‘작업을 완수한다’라고 말하는 것과 똑같이 ‘시련을 완수한다’라고 했다. 우리에게는 완수해야 할 시련이 너무나 많았다. 따라서 우리는 될 수 있는 대로 나약해지지 않고, 남몰래 눈물 흘리는 일을 최대한 자제하면서 있는 그대로의 고통과 대면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렇다고 눈물 흘리는 것을 부끄러워할 필요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물은 그 사람이 엄청난 용기, 즉 시련을 받아들일 용기를 가지고 있다는 걸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주 극소수의 사람만이 그것을 깨달았다. 어떤 사람들은 부끄러워하면서 자기가 운 적이 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한번은 부종 때문에 고생하던 동료에게 어떻게 나았냐고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그가 이렇게 대답했다.
“실컷 울어서 내 조직 밖으로 몰아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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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지 아는 사람은 어떤 어려움도 참고 견딘다’라는 니체의 말에는 이런 예지가 담겨 있다. 이 말에서 정신 치료에도 유용한 어떤 좌우명을 찾을 수 있다.
(중략)
이 이야기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돼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이런 긴장은 인간에게 본래부터 있는 것이고, 정신적으로 잘 존재하기well-being 위해서 필수 불가결한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 내면에 잠재된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도전장을 던지는 일을 주저해서는 안 된다. 그렇게 해야만 그동안 숨어 있던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를 일깨울 수 있다. 사람에게 우선적으로 필요한 것은 마음의 안정 혹은 생물학에서 말하는 항상성homeostasis, 즉 긴장이 없는 상태라고 흔히 말한다. 나는 정신 건강에서 이것처럼 위험천만한 오해는 없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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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
나는 의사들이 이 질문에 대해 일률적인 대답을 해 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삶의 의미는 사람에 따라, 시기에 따라, 시간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포괄적인 삶의 의미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서 한 개인의 삶이 갖는 고유한 의미라고 할 수 있다.
이런 의문에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는 무엇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임의 판세와 상대편 선수의 개인적인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가장 절묘한 수란 있을 수 없다.
인간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인간은 추상적인 삶의 의미를 추구해서는 안 된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할 특정한 일과 사명이 있다. 이 점에 있어서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그의 삶 역시 반복될 수 없다. 따라서 개인에게 부과된 임무는 거기에 부가돼 찾아오는 특정한 기회만큼이나 유일한 것이다.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따라서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오로지 책임감을 갖는 것을 통해서만 삶에 응답할 수 있다. 따라서 로고테라피에서는 책임감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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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본질)
인간은 책임감을 가져야 하며, 잠재되어 있는 삶의 의미를 실현해야 한다는 주장을 통해 내가 강조하고 싶은 것은 진정한 삶의 의미는 인간 내면이나 정신psyche에서 찾을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구조적 특성을 나는 ‘인간 존재의 자기 초월’이라고 이름 지었다. 이 말은 인간은 항상 자기 자신이 아닌 그 어떤 것, 혹은 그 어떤 사람을 지향하거나 그쪽으로 주의를 돌린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취해야 할 의미일 수도 있고, 혹은 그가 대면해야 할 사람일 수도 있다. 사람이 자기 자신을 잊으면 잊을수록 ─ 스스로 봉사할 이유를 찾거나 누군가에게 사랑을 주는 것을 통해 ─ 더 인간다워지며, 자기 자신을 더 잘 실현시킬 수 있게 된다.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 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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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의미)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을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사랑으로써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본질적인 특성과 개성을 볼 수 있으며, 더 나아가 그 사람이 잠재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 아직 실현되지 않았지만 앞으로 실현돼야 할 것이 무엇인지도 볼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인간은 사랑의 힘으로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잠재력을 발휘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사랑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그리고 자신이 어떻게 돼야 하는지를 깨닫게 함으로써 잠재 능력을 실현시킬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로고테라피에서는 사랑을 소위 승화라는 의미에서의 성적 충동이나 본능의 단순한 부수 현상(일차적 현상의 결과로 발생하는 현상)으로 해석하지 않는다. 사랑은 섹스와 마찬가지로 지극히 근원적인 하나의 현상이다. 섹스는 사랑을 표현하는 하나의 방식이다. 섹스는 그 안에 사랑이 담기는 순간, 아니 사랑이 담겨 있을 때에만 정당화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신성화될 수도 있다. 따라서 사랑을 섹스의 부산물 정도로만 이해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오히려 섹스를 사랑이라 불리는 궁극적인 합일의 경험을 표현하는 수단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세 번째로 삶의 의미를 찾는 방법은 시련을 통해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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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련의 의미)
아무리 절망스러운 상황에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운명과 마주쳤을 때에도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유일한 인간의 잠재력이 최고조에 달하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잠재력은 한 개인의 비극을 승리로 만들고, 곤경을 인간적 성취로 바꾸어 놓는다. 상황을 더 이상 바꿀 수 없을 때 ─ 수술이 불가능한 암 같은 불치병에 걸렸다고 생각해 보자 ─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변화시켜야 한다.
명쾌한 사례를 하나 들어 보겠다. 한번은 나이 지긋한 개업의 한 사람이 우울증 때문에 상담을 받으러 왔다. 그는 2년 전에 세상을 떠난 아내에 대한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아내를 이 세상 누구보다 사랑했다. 내가 그를 어떻게 도울 수 있을까? 그에게 어떤 말을 해 주어야 할까?
나는 그에게 다음과 같이 질문한 것을 제외하고는 말을 될 수 있는 대로 자제했다.
“만약 선생님이 먼저 죽고 아내가 살아남았다면 어떻게 됐을까요?”
그가 말했다.
“오 세상에! 아내에게는 아주 끔찍한 일이었을 겁니다. 그걸 어떻게 견디겠어요?”
내가 말했다.
“그것 보세요. 선생님, 부인께서는 그런 고통을 면하신 겁니다. 부인이 그런 고통을 겪지 않게 한 게 바로 선생님입니다. 그 대가로 지금 선생께서 살아남아 부인을 애도하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는 조용히 일어서서 내게 악수를 청한 후 진료실을 나갔다. 어떤 의미에서 시련은 그것의 의미─ 희생의 의미 같은 ─를 알게 되는 순간 시련이기를 멈춘다고 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정상적인 의미의 치료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첫째 그의 절망은 병이 아니었으며, 둘째 내가 그의 운명을 바꿀 수 없었고, 그의 아내를 살릴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 나는 바뀔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그의 태도를 바꾸는 데 성공했다. 그래서 이제 그는 최소한 자기가 겪고 있는 시련의 의미를 찾을 수 있게 됐다.
인간의 주된 관심이 쾌락을 얻거나 고통을 피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어떤 의미를 찾는 데 있다는 것은 로고테라피의 기본 신조 중 하나이다. 자기 시련이 어떤 의미를 갖는 상황에서 인간이 기꺼이 그 시련을 견디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확실하게 밝혀 두어야 할 것이 있다. 의미를 발견하는 데 시련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나는 단지 시련 속에서도 ─ 그 시련이 피할 수 없는 시련일 경우 ─ 의미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러나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 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248/300
(삶의 일회성)
‘가능성 대신에 나는 내 과거 속에 어떤 실체를 갖고 있어. 내가 했던 일, 내가 했던 사랑뿐만 아니라 내가 용감하게 견뎌 냈던 시련이라는 실체까지도 말이야. 이 고통들은 내가 가장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이지. 비록 남들이 부럽다는 생각을 하지는 않지만 말이야.’
250/300
쾌락은 어떤 행위의 부산물이자 파생물로 얻어지는 것이고, 또 그렇게 얻어져야만 한다. 그것 자체가 목적이 되면 그것은 파괴되고 망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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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여러 개의 사물 속에 섞여 있는 또 다른 사물이 아니다. 사물들은 각자가 서로를 규정하는 관계에 있지만 인간은 궁극적으로 자기 자신을 규정한다. 타고난 자질과 환경이라는 제한된 조건 안에서 인간이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은 전적으로 그의 판단에 달려 있다.
나는 살아 있는 인간 실험실이자 시험장이었던 강제 수용소에서 어떤 사람들이 성자처럼 행동할 때, 또 다른 사람들은 돼지처럼 행동하는 것을 보았다. 사람은 내면에 두 개의 잠재력을 모두 가지고 있는데, 그중 어떤 것을 취하느냐 하는 문제는 전적으로 본인의 의지에 달려 있다.
우리 세대는 실체를 경험한 세대이다. 왜냐하면 인간이 정말로 어떤 존재인지 알게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이나 <셰마 이스라엘>을 외울 수 있는 존재이기도 한 것이다.
271/300
(비극에서의 낙관)
유럽 사람의 눈에는 미국 문화가 인간에게 ‘행복하기를’ 끊임없이 강요하고 명령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게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알다시피 인간은 행복을 찾는 존재가 아니라 주어진 상황에 내재해 있는 잠재적인 의미를 실현시킴으로써 행복할 이유를 찾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끝-
[목차]
제1부 강제 수용소에서의 체험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보통 사람 이야기
카포, 우리 안의 또 다른 지배자
치열한 생존 경쟁의 각축장
이 책을 쓰게 된 동기
믿음을 상실하면 삶을 향한 의지도 상실한다
도살장 아우슈비츠에 수용되다
집행 유예 망상
삶과 죽음의 갈림길
무너진 환상 그리고 충격
냉담한 궁금증
인간은 어떤 환경에도 적응할 수 있다
절망이 오히려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죽음에의 선발을 두려워하지 말라
혐오감
무감각
주검과 수프
죽음보다 더한 모멸감
무감각한 죄수도 분노할 때가 있다
한 카포에게서 받았던 작은 혜택들
수감자들이 가장 흔하게 꾸는 꿈
먹는 것에 대한 원초적 욕구
메마른 정서
수용소 안에서의 정치와 종교
인간에 대한 구원은 사랑 안에서, 사랑을 통해 실현된다
나를 그대 가슴에 새겨 주오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울 수도 있다니
강제 수용소 안에서의 예술
강제 수용소에서의 유머
사소한 것에서 느끼는 상대적인 행복
상대적 행복을 느꼈던 환자 생활
생존을 위해 군중 속으로
나 혼자만의 공간
번호로만 취급되는 사람들
운명의 장난
테헤란에서의 죽음
운명을 가르는 결정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
엇갈린 운명
무감각의 원인
인간의 정신적 자유
시련의 의미
끝을 알 수 없는 일시적 삶
미래에 대한 기대가 삶의 의지를 불러일으킨다
미래에 대한 믿음의 상실은 죽음을 부른다
살아야 할 이유
완수해야 할 시련이 그 얼마인고
자살 방지를 위한 노력
집단정신 치료의 경험
수용소의 여러 인간 군상
해방의 체험
해방 이후 나타난 현상들
비통과 환멸
제2부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로고테라피의 기본 개념
의미를 찾고자 하는 의지
실존적 좌절
누제닉 노이로제
정신의 역동성
실존적 공허
삶의 의미
존재의 본질
사랑의 의미
시련의 의미
임상에 따른 문제들
로고드라마
초의미
삶의 일회성
기법으로서의 로고테라피
집단적 신경증
범결정론에 대한 비판
정신 의학도의 신조
인간의 얼굴을 한 정신 의학
제3부 비극 속에서의 낙관
비극 속에서의 낙관
저자에 대해
로고테라피에 관한 참고 문헌
댓글
여려 책을 읽다보면 '죽음의 수용소에서'의 내용이 자주 나와, 저는 호기심에 구입해 두고 아직 읽지 않았습니다. 이렇게 조장님 서평을 읽다보니, 내 생각을 꼭 아웃풋 해야하는 중요성을 알게 됐습니다. 그리고 '행복의 기워'와 비교하는 부분에서 로버트 기요사키씨가 말한 "동전의 옆면에 서서 동전의 양면을 동시에 본다"라는 의미를 조금 알겠네요. 후기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