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와 존재는 근본적으로 다른 인간 체험의 두 가지 형태로서, 그 각 양식의 강도가 개인의 성격 및 여러 유형의 사회적 성격의 차이를 결정한다.
‘존재’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소유하거나 소유하려고 탐하지 않고 기쁨에 차서 자신의 능력을 생산적으로 사용하고 세계와 하나가 되는, 그런 실존양식을 의미한다.
소유지향은 돈, 명예, 권력에의 탐욕이 삶의 지배적인 주제가 되어버린 서구 산업 사회 인간들의 특성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세계에 대한 나의 관계는 나의 것으로 만들고자 하고 나의 것으로 만드는 관계, 자신을 포함하여 모든 사람과 모든 사물을 나의 것으로 만들려는 관계이다.
요약히면, 소비는 소유의 한 형태이다. 현대 소비자는 나=내가 가진 것=내가 소비하는 것이라는 등식에서 자신의 실체를 확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길든 학생들은 강의를 들을 때, 놓치지 않고 어휘들을 경청한 뒤 그 논리적 연관과 의미를 파악하여 가능한 한 모조리 노트에 기록한다. 그래서 필기한 것을 나중에 암기하여 시험에 합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내용은 그들 고유의 사고체계를 풍요롭고 폭넓게 하는 구성요소가 되지는 못할 것이다. 존재양식으로 세계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생들은 강의가 다루는 주제를 미리 고찰하고 특정한 문제와 의문에 대해서 골몰한다. 그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낱말과 사상을 수신하지 않고, 경청하며, 듣는 데에 그치지 않고 능동적이고 생산적응로 수용하고 대응한다.
존재양식으로의 기억은 능동적 활동이다. 우리가 떠올리려고 하는 구체적 단일 사실과, 그것과 연관된 다른 여러 사실들 사이에 접속이 생기는 것이다. (…) 기억하고 싶은 것을 기록해놓는 것도 또다른 형태의 소외된 기억이다.
“소유적 인간”은 자기가 가진 것에 의존하는 반면, “존재적 인간”은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 자기가 살아 있다는 것, 기탄없이 응답할 용기만 지니면 새로운 무엇이 탄생하리라는 사실에 자신을 맡긴다.
소유와 존재의 실존양식의 차이는 권의를 행사하는 데에서도 그 예를 볼 수 있다. 그 차이의 요점은 권위를 소유하고 있느냐, 아니면 권위로 존재하느냐이다. (…) 합리적 권위는 그 권위에 의존하는 인간의 성장을 촉진시키며, 권능을 바탕으로 한다. 비합리적 권위는 권력을 바탕으로 부지되며, 권력에 굴하는 사람들을 착취한다. (…) 존재양식의 권위는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는 능력뿐 아니라 고도로 자기실현과 자기완성을 이룩한 인간의 인격을 바탕으로 세워진다. 그런 인물에게서는 저절로 권위가 배어나온다.
지식 영역에서 소유와 존재의 실존양식의 차이는 “나는 지식을 가지고 있다”와 “나는 알고 있다”라는 두 가지 어법에서 드러난다.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함은 이용할 수 있는 지식(정보)을 획득하여 확보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나는 알고 있다”는 의미에서의 앎은 기능적인 것으로 생산적 사고과정의 한 부분이다. 앎[깨달음]은 미망을 깨뜨리는 것, “착각에서 벗어나는 것”에서 비롯된다. 존재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깊이 아는 것인 반면, 소유양식의 지고의 목표는 보다 많이 아는 것이다.
근본적으로 신은 우리가 내면에서 경험할 수 있는 지고의 가치의 상징이다. 그러나 신은 하나의 우상이 된다. (..) 존재양식으로서의 신앙은 일차적으로 특정한 이념들에 대한 믿음이 아니고, 내적인 성향, 일종의 마음가짐이다.
사랑이란 누군가를 배려하고 알고자 하며, 그에게 몰입하고 그 존재를 입증하며 그를 보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을 내포한다. 그것은 그(그녀 또는 그것)를 소생시키며 그(그녀 또는 그것)의 생동감을 증대시킨다. 사랑은 소생과 생장을 낳는 과정이다. 그러나 소유양식으로 체험되는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구속하고 가두며 지배함을 의밓나다. 문제는 결혼이라는 형태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두 배우자의 소유지향적 성격구조에, 그리고 궁극적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사회구조에 있다.
안식일의 의미는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자연 사이에 완전한 조화를 재수립한다는 의미에서 평온함을 뜻한다. 그 어떤 것을 파괴하는 것은 물론 새롭게 짓는 것도 허용되지 않는 그런 평온함 말이다. 안식일에만은 모두가 마치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듯, 존재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목적도 추구하지 않는 듯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시 말하면 자신의 본질적인 힘을 쓰기 위해서 사는 것-오로지 기도하고 연구하며, 먹고 마시고, 노래 부르며 사랑하는 것이다. (..) 그런가하면 현대의 일요일은 즐기는 날, 소비의 날, 자기 자신으로부터 도피하는 날이 되어버렸다.
에크하르트가 의미하는 원하는 상태는 불교사상에서도 근본 범주를 이루는 소유의지, 즉 탐심, 탐욕, 이기주의와 동의어다.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 사람이란 그 어떤 것에 대해서도 욕구를 가지지 않는 사람이다. 이것이 "비집착(초연함)이라는 에크하르트적 개념의 요체이다.
“인간이여, 그대의 지식을 비워버리라.”는 그의 요구는 알고 있는 것을 잊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알고 있다는 사실을 잊으라는 의미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는 지식을 자기를 확인시키고 자신감을 심어주는 기능적인 소유물로 간주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다.존재양식에서의 지식은 곧 파고드는 사유행위 그 자체이다. “소유하지 않음”의 의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말고 아무런 행위도 하지 말라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우리가 소유하고 행하는 것에-심지어는 신에게조차-묶이고 속박당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서 결정적인 요소는 소유하는 여러 대상물이 아니라 그것에 대한 인간의 전반적인 마음가짐이다. 그 무엇이든 욕망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일용품, 재산, 의식, 선행, 지식, 사상 등등. 이 모든 사상들은 그 자체로 나쁜 것이 아니라 나쁜 것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그것들에 집착할 때 그리하여 그것들이 우리의 자유를 구속하는 족쇄가 될 때 그것들은 우리의 자기실현에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깊이 생각해야 할 것은 내가 무엇을 행할 것인가이기보다는, 나는 과연 어떤 존재인가이다. 무엇을 얼마나 많이 행하느냐보다는 선하게 존재하는 것에 비중을 두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행위를 받치고 있는 근본이다. 우리의 존재는 실재이며, 우리를 움직이는 정신이요, 우리의 행동을 규정하는 성격이다. 에크하르트가 말하는 존재의 두 번째 의미는 한결 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것이다. 존재는 삶이며 활동이요, 탄생이며 재생이고, 흘러나와서 흘러가는 것이며, 생산활동이다. 이런 의미에서 존재는 소유, 아집, 아욕의 반대개념이다.
제2부 두 실존양식의 근본적 차이에 대한 분석
소유의 본질 : 소유적 실존양식은 사유재산에서 파생되어 나온다. 이 양식에서 중요한 것은 오로지 나의 것으로 하는 것과 그렇게 취득한 것을 보유하는 무제한의 권리이다. 소유지향의 태도는 타인을 배제하며, 나의 재산을 지키고 그것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려고 부심하는 것 이외에는 자신에게 다른 노력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 자신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그것이 나를 존재하게 하는 주체이다. 내가 이해하는 자유란 일체의 지배적 원리를 벗어던지는 자유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구조에 맞게 성장을 가능하게 하는 자유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적절한 발전을 보장해주는 법칙들을 준수함을 의미한다.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며, 사물이란 구체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것이다. 존재는 체험과 관계하며, 체험이란 원칙적으로 묘사할 수 없는 것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의 전제조건은 독립과 자유 그리고 비판적 이성을 지니는 것이다. 그 가장 본질적 특성은 능동성이다. 여기서 능동성이라고 함은 겉으로 보기에 바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힘을 생산적으로 사용한다는 의미에서의 내면적 활동상태를 뜻한다. 이 활동상태는 인간에게 주어진 소질과 재능, 천부적으로 갖추어진 풍요로운 인간적 재능의 표출이다. 다시 말할면 자기를 새롭게 하는 것, 자기를 성장시키고 흐르게 하며 사랑하는 것, 고립된 자아의 감옥을 초극하며, 관심을 가지고 귀 기울이며 베푸는 것을 의미한다.
소외된 활동을 할 때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하지 않고 나의 활동의 결과로 체험한다. 근본적으로 행동의 주체는 나 자신이 아니고, 내적 혹은 외적 힘이 나를 통하여 행동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의 경우, 나는 나 자신을 행동의 주체로 체험한다. 소외되지 않은 활동은 탄생과 생산의 과정이며, 이때 나와 나의 생산품과의 관계는 그대로 유지된다. 이는 또한 나의 활동이 나의 힘과 능력의 표출임을, 나와 나의 활동 그리고 그 활동의 결과가 일치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소외되지 않은 활동을 생산적 활동이라고 부르기로 하자. 생산적 활동이란 내면적 능동의 상태를 표현하는 말이다.
존재의 또다른 의미내용은 현상[겉으로 보이는 것]과 대비시킬 때 분명해진다. 나의 성격구조, 즉 내가 드러내는 태도 이면의 진정한 동기가 나의 참존재이다. 나의 태도는 때에 따라서는 나의 존재를 반영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목적을 이루는 데에 유익하기 때문에 쓰는 가면이기 일쑤이다.
타자와의 일체감을 체험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인간이라는 종 특유의 실존조건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인간의 행동을 낳는 가장 강력한 원동력의 하나이다.
어느 사회에서나 중요한 것은 그 사회가 어떤 종류의 일체감의 체험과 연대감을 조성하고 있고, 또한 그 사회경제적 구조의 여건하에서 어떻게 그것들을 뒷받침할 수 있느냐이다. 이 고찰들은 인간 내부에는 두 가지 성향이 있다는 결론을 허용한다. 그 하나는 소유하고자 하는, 자기 것으로 하려는 성향으로서 궁극적으로 살아남고자 하는 생물학적 소망에서 뻗어나온 힘이다. 다른 하나는 존재하고자 하는, 나누어가지고 베풀고 희생하려는 성향으로서 인간실존의 특유의 조건에서, 특히 타자와 하나가 됨으로써 자신이 고립을 극복하려는 타고난 욕구에서 나온 성향이다. 우리는 이 두 잠재성 가운데 어느 것을 개발할 것인가를 결정해야 하며, 아울러 우리의 결정은 그 어느 한쪽 성향으로의 해결을 조장하는 우리 사회의 사회경제적 구조에 상당 부분 달려 있다는 사실을 염두해 두어야 한다.
만약 나의 소유가 곧 나의 존재라면, 나의 소유를 잃을 경우 나는 어떤 존재인가? 소유하고 있는 것이란 잃을 수 있는 것이므로, 나는 응당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을 언제이고 잃을세라 줄곧 조바심 내기 마련이다. 가진 것을 잃을 수 있다는 위험에서 생기는 불안과 걱정은 존재적 실존양식에는 없다.존재하는 자아=나일 뿐 소유하고 있는 것=나가 아니라면, 어느 누구도 나를 앗아가거나 나의 안정과 나의 주체적 느낌을 위협할 수는 없을 것이다. 나의 중심은 나 자신의 내부에 있고-존재하면서 나의 고유의 힘을 표현하는 능력은 나의 성격 구조의 일부로서 나에게 달려있다. 소유는 사용에 따라서 감소하는 반면, 존재는 실천을 통해서 증대한다. 베푸는 것은 상실되지 않으며, 반대로 붙잡고 있는 것은 잃기 마련이다.
소유적 실존양식에 근거한 인간관계는 경쟁심, 적대감, 두려움으로 특징지어진다.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은 필연적으로 많이, 더 많이, 최대한으로 소유하려는 욕구를 초래할 수 밖에 없다. 소유적 실존양식과 그로 인해서 야기되는 탐욕이 필연적으로 인간간에 적대감과 투쟁을 초래하는 점은 개인뿐만 아니라 민족 간에도 해당된다. 존재적 실존양식에서는 이러한 개인적 소유가 정서적으로 거의 무의미하다. 나는 즐기기 위해서 무엇을 소유할 필요도 없고, 심지어는 이용하기 위해서도 반드시 그것을 필요로 하지 않기 때문이다. 누구도 혼자 즐기겠다고 그것을 자기 것으로 소유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은 분쟁을 막을 뿐 아니라, 기쁨을 나눈다는 인간 행복의 가장 깊은 체험을 낳는다.
극단적 쾌락주의자가 추구하는 쾌락, 현대사회에 만연된 쾌락산업과 끊임없는 새로운 자극의 충족은 각기 다른 정도의 말초적 흥분을 불러일으킨다.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기쁨으로 충만시키지는 못한다. 오히려 기쁨이 부재하는 삶이 사람들로 하여금 새롭고 좀더 자극적인 쾌락을 끊임없이 추구하도록 몰아간다. 기쁨은 생산적 활동에 수반되는 현상이다. 그것은 정점에 이르렀다가 느닷없이 추락하는 식의 “절정의 체험”이 아니라 수평의 상태, 인간 고유의 능력이 생산적으로 전개됨에 따라서 수반되는 정서의 형태이다. 기쁨이란 몰아의 경지, 순간의 불꽃이 아니라 존재에 내재하는 불씨이다. 기쁨은 자기실현이라는 목표를 향해가는 도상에서 우리에게 다가오는 체험이다.
소유적 실존양식, 즉 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곧 불복종이며 회오 → 징벌 → 새로운 굴종으로 특징지어진다. 존재적 실존양식, 비권위주의적 구조에서의 죄는 미결의 격리상태[소외]이며 이성과 사랑을 완전히 펼침으로써, 하나가 됨으로써 극복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는 길은 단 하나밖에 없다. 그것은 석가모니와 예수, 에크하르트 수사가 가르쳐준 실로서 삶에 집착하지 않는 것, 삶을 소유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음 자체를 두려워한다기보다, 소유하고 있는 것을 잃는 것에 대해서 두려워한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에 맞서는 투쟁은 소유를 줄이고 존재 안에서 성장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의 일환이어야 한다. “자유로운 인간은 죽음에 대해서는 최소한으로만 생각한다. 그의 지혜로움은 죽음에 대한 것이 아닌 삶에 대한 숙고이다.”라고 스피노자는 말한다. 죽음에의 입문은 사실상 삶에 대한 입문이다. 모든 형태의 소유물에 대한 욕구, 특히 자아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날수록 그만큼 죽음에 대한 우리의 두려움도 줄어든다. 왜냐하면, 우리는 잃을 것을 그만큼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존재적 실존양식은 오로지 지금, 여기에만 있다. 반면 소유적 실존양식은 과거, 현재, 미래라는 시간 안에 있다.
제3부 새로운 인간과 새로운 사회
개인의 정신적 구조와 사회경제적 구조 간의 상호작용의 결과를 사회적 성격이라고 이름 붙이기로 한다.
저자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성격 구조를 “시장적 성격”으로 칭한다. 그 이유는 개개인이 자기 자신을 상품으로, 그리고 자신의 값을 “사용가치”로서가 아니라 “교환가치”로서 체험하고 있는 사실에 근거한다. 시장적 성격의 최고 목표는 인품시장의 그 어떤 조건하에서도 탐나는 인품이 되려고 전인적으로 적응하는 것이다. 시장적 성격구조를 가진 사람들은 끊임없이 움직이며 만사를 최대한 효율적으로 행하는 것 말고는 다른 아무 목표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은 항상 변하는 큼직한 자아를 가지고 있으되, 그들 가운데 어느 한사람도 진정한 자아, 하나의 심지, 자아의 실체적 체험을 보유하고 있지 않다. 현대 사회의 “자아의 실체성(아이덴티티)의 위기”는 그 구성원들이 자아를 상실한 도구들도 변해버려서, 대기업에 속해 있는 것으로 자신을 증명할 수 밖에 없게 된 사실에 근거한다.
만사를 소홀히 대하는 그들의 태도는 정서적 유대, 심지어는 자기와 가장 가까운 사람들과의 유대마저 상실한 결과이다. 실제에 있어서, 시장적 성격에는 가까운 사람이 없다. 하다못해 자기자신 마저도.
마르크스는 존재와 소유에 대한 자신의 이해를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그대의 존재가 적으면 적을수록, 그대가 그대의 삶을 덜 표출할수록, 그만큼 그대는 더 많이 소유하게 되고, 그만큼 그대의 소외된 삶은 더 커진다.”
많은 사람들이 자유로운 개성으로서 사고하는데에는 무력해지고, 모든 면에서 오로지 소속된 집단이 이끄는 대로 자신을 내맡기고 있기 때문이다. 사고의 독립을 포기함으로써 우리는 진리에 대한 신념을 잃었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일벌레로 살아가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본질이 위축되고 그렇게 위축된 부모 밑에서 자라는 아이들의 경우에도 인간으로서의 발달에 본질적인 요소가 결여되게 된 것이다. “나중에 그 자신 또한 과도한 일에 시달리게 되면, 점점 더 천박한 오락에의 욕구에 빠지게 된다. 절대적 무의도식, 자기 자신을 외면하고 망각하는 것, 그것은 바로 그의 육체가 요구하는 바이다.”
유일하게 의미 있는 삶의 방식은 세계 속으로 적극적으로 파고드는 활동이다. 그것도 세계 자체를 위한 활동이 아니라 이웃을 위해서 배려하고 베푸는 활동이다. 이것이 슈바이처가 자신의 저술과 실천적 삶을 통해서 전파했던 메시지이다.
나는 다음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실제로 인간의 성격은 변화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 우리는 고통을 받으면서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 - 우리는 우리의 고통(불행)의 원인을 인식하고 있다. - 우리는 우리의 고통을 극복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 있다.
- 우리의 고통을 극복하기 위해서, 우리는 특정한 행동규범을 가져야 하며 현재의 생활습관을 변화시켜야 함을 인식하고 있다.
새로운 사회의 기능은 다음과 같은 성격구조의 특성을 가진 새로운 인간의 출현을 촉진시키는 일이다. - 완전히 존재하기 위해서 모든 형태의 소유를 기꺼이 포기할 마음 가짐. - 자기 것으로 만들고 세계를 지배하며, 그래서 결국 자기 소유물의 노예가 되는, 그런 소유에서의 욕구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에 대한 믿음과 관계에의 욕구, 관심, 사랑, 주변 세계와의 연대감을 바탕으로 한 안정감, 자아 체험, 자신감. - 나 자신 이외에는 그 누구도, 그 어떤 사물도 나의 삶에 의미를 주지 않는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것. - 베풀고 나누어가지는 데에서 우러나오는 기쁨.
- 현시된 모든 면에서 삶을 사랑하고 경외감을 느끼는 것. - 인간의 삶의 최고 목표는 자신의 인격과 아울러 이웃의 인격을 완전히 개화시키는 것임을 깨닫는 것. - 이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는 수양과 아울러 현실을 인정할 필요가 있음을 깨닫는 것. - 의식된 자아뿐만 아니라, 누구나 몽롱하게밖에 모르는 무의식의 자아까지도 인식하는 것. - 모든 생먕체와 일체감을 느끼는 것. - 운명이 우리에게 허용하는 아득한 목표지점이 어디에 있든 간에 끊임없이 서애장하는 생명의 과정 속에서 행복을 느끼는 것. 왜냐하면 그렇게 의식하며 능력껏 최선을 다하는 삶은 그 자체로 충족되는 것이므로, 그것의 성취 여부는 문제가 되지 않으므로.
3. 나에게 어떤 점이 유용한가?
: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돌아보게 되었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 존재적 삶의 양식이 필요함을 알게 되었다.
가진 것에 대한 집착을 내려놓는 것. 능동적으로 경험함으로써 자아를 실현하는 것, 지금, 이 순간 현재에 존재하는 것, 모든 생명체를 존중하는 것. 베풀고 함께 나누어 누리는데서 오는 기쁨을 느끼는 것. 등!
4. 이 책에서 얻은 것과 알게 된 점 그리고 느낀 점
: '나는 문제를 한 개 가지고 있다.'에서처럼 일상생활에서 무의식적으로 쓰던 언어에도 소유 양식이 녹아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의식적으로 소유양식의 언어를 줄이려고 노력해야겠다. 학생 때 내가 공부를 했던 방식도 소유적 실존양식에 가깝다는 걸 알았다. 학습한 걸 내 걸로 소화하기보다 단순히 암기하고 그대로 출력하는데 그쳤던 것 같아 반성했고 앞으로 학습을 할 때는 좀 더 능동적으로 참여해야겠다. 사랑과 종교, 지식의 측면에서 소유와 존재의 양식의 사례를 분석한 부분도 와 닿았다. 존재양식으로 사랑한다는 건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배려하는 것, 사랑함으로써 그로 하여금 생동감과 생기가 넘쳐흐르도록 하는 것이다. 존재양식으로서 지식은 지식으로 나를 채우는 게 아니라 사고 과정, 더 깊이 이해하는 것 그 자체에 있다. 종합해보면 존재 양식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불교의 가르침과 일치하는 듯하다. 지식, 재산, 사람, 물건 등을 소유하려는 집착에서 벗어나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자신 내면의 자아를 능동적으로 발휘하며 생산적으로 살아가려고 노력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