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우리 가족은 큰 결심을 했습니다.
올해 어린이날에 에버랜드를 가보기로 한 겁니다.
아내가 검색을 시작했고, 5분도 안 돼서 우리 둘 다 같은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작년에 그렇게 난리였는데, 올해도 가면 죽어나겠지."
"그냥 다른 데 가자."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비슷했습니다.
"어린이날에 에버랜드를? 정신 나갔어?"
그렇게 우리 가족은 어린이날 에버랜드를 포기했습니다.
그리고 2026년 5월 5일.
스레드와 인스타그램에 올라온 사진들을 보고 저는 그대로 굳어버렸습니다.
"어린이날 에버랜드 근황. 눈치게임으로 다들 안 온 듯ㅎㅎ"
휑한 사파리월드 입구.
대기 줄이 사라진 T 익스프레스.
여유롭게 사진을 찍고 있는 가족들.
저는 그 사진을 보면서 깨달았습니다. 저만 똑똑한 게 아니었습니다.
2022년 5월 5일.
사회적 거리두기 해제 후 맞은 첫 어린이날.
오전 10시 개장과 동시에 인파가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당시 보도들은 그날의 풍경을 "출퇴근 시간의 지하철" 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사파리월드 같은 주요 어트랙션 대기 시간은 최대 200분.
3시간 넘게 줄 서야 놀이기구 하나를 탈 수 있었습니다.
이 경험을 한 부모들이 한국에 수십만 명입니다.
다들 똑같이 결심했을 겁니다.
"내년 어린이날은 절대 에버랜드 안 간다."
그리고 그다음 해.
또 그다음 해.
또 그다음 해, 2026년이 됐습니다.
같은 결심을 한 부모가 너무 많았습니다.
모두가 "이번엔 사람이 많을 거야"라고 판단해서, 결국 아무도 안 갔습니다.
각자의 판단은 완벽하게 합리적이었습니다.
지난 4년의 데이터, 작년의 200분 대기, 가족의 피로도.
이 모든 정보를 종합한 합리적 결론이 "올해는 가지 말자"였습니다.
문제는 다른 부모 수만 명도 똑같이 합리적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패턴을 알게 되자, 무서운 예측이 가능해집니다.
올해 어린이날이 한산했다는 사진이 SNS에 퍼졌습니다.
내년 봄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보입니다.
이 사진들을 본 부모들이 또 똑같이 결론 내릴 겁니다.
"작년에 한산했다더라. 내년은 가도 되겠다."
수만 가족이 같은 합리적 판단을 내릴 겁니다.
그리고 2027년 어린이날, 에버랜드는 다시 2022년처럼 대혼잡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2년 주기로 혼잡 → 한산 → 혼잡 → 한산이 반복되는 사이클이 만들어집니다.
이 현상이 에버랜드에서만 벌어진다면 그저 재밌는 가족 에피소드로 끝납니다.
이 현상은 어린이날 에버랜드에서만 벌어지지 않습니다.
명절 새벽 4시 귀성길 → "이 시간이면 한산하겠지" 한 사람이 수만 명입니다.
가을 단풍철 설악산 주차장 → "평일 오전이면 괜찮을 거야" 한 차량이 산을 가득 메웁니다.
인기 식당의 평일 저녁 → "주말 피해 평일에 가자" 한 가족이 평일을 더 붐비게 합니다.
개인의 합리성이 집단의 비합리성을 만들어냅니다.
저는 이 패턴이 점심 식당이나 귀성길에만 머무는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돈이 가장 많이 사라지는 자리에서도 정확히 같은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투자를 하면서 이 패턴을 너무 자주 봤습니다.
2008년 9월 15일.
미국 4대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파산을 신청합니다.
이날 다우존스 지수는 504포인트 빠집니다.
그런데 진짜 사건은 그 전 5년 동안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당시 모든 은행과 펀드들은 같은 결론에 도달해 있었습니다.
"미국 부동산은 안 떨어진다."
"AAA 등급 모기지 채권은 안전 자산이다."
"여러 모기지를 묶어서 분산하면 위험이 사라진다."
이 판단은 개별 기관 입장에서 완벽하게 합리적이었습니다.
수십 년간 미국 집값은 단 한 번도 전국적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습니다.
평균보다 위험한 모기지 1만 개를 묶으면 통계적으로 안전해진다는 모델도 작동했습니다.
문제는 단 하나였습니다.
모든 은행이 똑같이 합리적이었습니다.
수백 개 금융기관이 같은 모델을 썼습니다.
같은 가정을 했습니다.
같은 자산을 사들였습니다.
집값이 단 한 번 흔들리자, 모두가 동시에 팔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동시에 팔기 시작하자, 살 사람이 사라졌습니다.
살 사람이 사라지자, 가격이 폭락했습니다.
가격이 폭락하자, 더 많은 기관이 손절 모델에 따라 팔아야 했습니다.
한 기관의 합리적 리스크 관리가, 모든 기관이 동시에 하자 시스템 전체의 리스크가 됐습니다.
점심 식당에서 "다들 안 오겠지" 하고 갔다가 줄이 더 길어진 것과 정확히 같은 구조입니다.
2008년이 너무 멀게 느껴진다면, 한국으로 와봅니다.
2020년 봄부터 2022년 상반기까지.
저금리, 유동성, 집값 폭등.
30대 직장인들이 똑같은 생각에 도달합니다.
"지금 안 사면 영영 못 산다."
"이자는 어떻게든 감당하면 된다."
"집값은 안 떨어진다, 적어도 서울은."
각자의 판단은 합리적이었습니다.
연봉 5천만 원, 결혼을 앞두고 있고, 전세 보증금은 매년 오르고, 청약은 도저히 안 됩니다.
이 상황에서 "지금 사야 한다"는 결론은 개인 입장에서 합리적입니다.
문제는 동시대 30대 수십만 명이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같은 시점에, 같은 이유로, 같은 행동을 했습니다.
그 결과 매수 수요가 폭발했고
매수 수요가 가격을 더 끌어올렸고
끌어올린 가격이 "지금이라도 사야 한다"는 결론을 더 강하게 만들었고
정점에서 금리가 오르자, 모두가 동시에 이자 부담을 견디지 못하게 됐습니다.
개인의 합리적 매수가, 집단적으로 모이자 영끌의 비극을 만들어냈습니다.
저는 그 시기에 투자를 하면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을 기억합니다.
"한가해보이님, 저 정말 합리적으로 계산하고 들어간 거예요."
맞습니다.
당시 그 결정은 개인 차원에서 합리적이었습니다.
다만 수십만 명이 동시에 똑같이 합리적이었다는 게 비극의 핵심이었습니다.
에버랜드 줄서기와 2008년 미국, 그리고 한국 영끌 사태에서 작동한 메커니즘은 같습니다.
이 셋을 관통하는 3가지 함정을 정리해봅니다.
내가 생각한 것은 다른 사람도 생각합니다.
내가 보는 자료는 다른 사람도 봅니다.
내가 도달한 결론은 다른 사람도 도달합니다.
"남들이 모를 거야"는 시장에서 가장 비싸게 갚는 가정입니다.
미국 집값은 안 떨어진다고 모두가 믿었습니다.
서울 아파트는 안 빠진다고 모두가 믿었습니다.
비트코인은 사이클을 따라가지 않는다고 모두가 믿었습니다.
모두가 "이번엔 다르다"고 믿는 그 순간이, 정확히 지난번과 같은 순간입니다.
2008년 미국 은행들이 쓰던 손절 모델은 개별 기관 입장에서 안전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기관이 같은 모델을 쓰자, 그 모델이 시장 붕괴의 트리거가 됐습니다.
부동산 시장에서 "월급의 30%만 대출 갚는다"는 원칙도, "전세 끼고 매수한다"는 전략도, 혼자 할 때와 모두가 할 때의 결과가 다릅니다.
이 역설에서 완전히 빠져나오는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영향을 줄이는 방향은 있습니다.
저는 이걸 부동산 투자에 적용할 때 3가지 질문으로 정리합니다.
평소에 해당 투자에 관심이 없던 옆자리 동료가 똑같이 알고 있다면, 그 정보는 이미 가격에 반영돼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손에 잡히는 호재가 들리는 시점은, 이미 그 호재가 가격에 들어간 시점입니다.
호재로 산다는 결정은 신중해야 합니다.
2021년엔 "지금 안 사면 평생 못 산다"였습니다.
2022년 말엔 "이제 끝났다"였습니다.
2024년 봄엔 "다시 시작이다"였습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할 때, 그 말은 거의 항상 틀립니다.
워런 버핏이 강조한 "다른 사람들이 탐욕스러울 때 두려워하고, 다른 사람들이 두려워할 때 탐욕스러워지라"는 말은 단순한 역발상이 아닙니다.
개인의 합리성이 집단의 비합리성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이해한 사람의 전략입니다.
점심 식당은 줄이 길어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나갈 때입니다.
부동산도 마찬가지입니다.
매수 경쟁은 치열할지 몰라도, 매도 시점에 살 사람이 있느냐는 다른 문제입니다.
저환수원리의 '환금성'이 여기서 답입니다.
입지가 좋은 자산일수록, 모두가 동시에 빠져나가야 하는 순간에도 사줄 사람이 남아있습니다.
저환수원리에서 환금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단순히 "잘 팔린다"가 아닙니다.
"모두가 동시에 팔아야 하는 순간에도 살 사람이 있다"는 보험입니다.
저는 이미 결심한 게 하나 있습니다.
내년 어린이날엔 다시 에버랜드를 검토해볼 겁니다.
"올해 한산했다더라"는 사진을 본 부모가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다들 같은 결론에 도달하기 직전입니다.
"작년에 한산했으니 올해는 가도 되겠다."
수만 가족이 같은 합리적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 판단은 거의 항상 틀립니다.
저는 부동산 시장을 같은 눈으로 봅니다.
2022년 영끌족이 무너졌습니다.
"이제 부동산 끝났다"는 말이 시장을 덮었습니다.
2023년 봄에 다들 "지금 사면 바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강남, 마포, 성동의 핵심 입지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모두가 같은 방향을 볼 때, 시장은 정확히 반대로 움직였습니다.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제 들어갈 때 아니다"는 말이 들리는 지역이 있습니다.
"여기는 무조건 더 간다"는 말이 들리는 지역도 있습니다.
저는 두 가지 모두 의심합니다.
모두가 같은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그 말이 이미 가격에 반영됐다는 신호이기 때문입니다.
투자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시장이 무너질 때가 아닙니다.
모두가 똑같이 합리적이라고 확신할 때입니다.
서울 아파트가 비싸니 사면 안된다.
지금 사람들이 하는 생각과 행동을 똑같이 하면 안된다.
이렇게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40대에 부동산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배운 것이 이것이었습니다.
"군중과 같은 방향을 본다고 안심하지 말 것."
"군중과 다른 방향을 본다고 자만하지 말 것."
다만 내가 보는 풍경이 정말 나만의 것인지, 아니면 수만 명이 동시에 보고 있는 풍경인지를 항상 점검할 것.
그것 하나만으로도 시장의 가장 큰 함정에서 한 발 비껴 설 수 있습니다.
올해 어린이날 한산했다는 에버랜드 사진을 보면서, 저는 부동산 시장의 다음 사이클을 봤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보셨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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