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아버지의 회사가 부산으로 이전했다.
어머니도 자연스럽게 내려가시면서 나는 인생 첫 독립을 시작하게 되었다. 부동산은 나에게 여전히 낯설고 복잡한 영역이었다. 누군가 대신 정리해주길 바랐고, 대리 진급을 앞두고 있었던 나는 ‘일로 바쁘다’는 핑계를 내세웠다.
당시 나는 부동산에 대해 전혀 몰랐다. 그렇기에 어느 아파트가 좋을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학교에서 그간 꾸준한 덕목으로 가르친 ‘성실함’과 ‘개근’의 덕목이 자본주의에도 적용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직장인이라면 근로 소득을 높이는 게 더 올바른 삶의 태도가 아닌가.'
게다가 나는 내 스스로 생각하기에 충분한 돈이 없었다. 아버지에게 차를 선물하고 난 후 내 잔고는 다시 제로였다. 어쩌면 나는 내 돈을 다 소모해 버리면 투자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묘한 안도감을 얻었던 것도 같다.
하지만 인생은 이상하게도 중요한 시점에 소중한 인연을 데려다 주곤 한다. 평소 사람을 잘 챙기시는 어머니께서 동네 부동산 소장님을 통해 괜찮은 매물을 추천 받으셨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기회는 나에게 주어진 일종의 ‘초심자의 행운’이었다.
여긴요, 지금 사두면 후회할 일 없을 거예요
추천 받은 아파트는 우리가 살던 곳보다 역세권에 가까운, 30평 대 구축 아파트였다. 인덕원역 도보권, 초등학교와 유치원이 단지 안에 있었으며, 바로 옆에는 신축 아파트가 들어설 예정이었다. 대규모 인프라가 함께 들어오면 이 일대도 빠르게 달라질 거라고, 부동산 소장님은 귀띔하셨다.
물론 아쉬운 점도 많았다. 30년이 된 구축 아파트였기에 외관은 낡았고, 주차난이 심각했다. 밤이 되면 차를 세울 자리가 없어 한참을 돌기 일쑤였다. 내부도 인테리어를 새로 해야 할 정도로 낡아 있었다. 하지만 그 무렵 나는 회사에서 새로운 매뉴얼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주도하느라 다른 것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회사 밖의 일상은 희미하기만 하다.
결국 세부 계약과 인테리어는 어머니와 동생이 도맡았다. 하지만 막상 계약을 결정하자마자 대출이라는 현실적인 문제는 나에게로 직행해왔다. 계약금만 4억 원. 내가 새롭게 모은 돈은 고작 2천만 원뿐이었다. 내 사정을 잘 아는 부모님은, 내가 아버지께 사 드린 차량 구매 비용을 다시 집 자금에 보태자고 하셨다. 그렇게 다시 모인 돈이 1억 원. 하지만 여전히 3억 원 가까이 대출을 받아야 했다.
그 무렵, 생애최초 주택구입자에게 주어지는 저금리 제도인 ‘디딤돌 대출’을 처음 알게 되었다. 이 대출을 통해 연 2.5% 고정금리로 1억 원을 30년 동안 빌릴 수 있었다. 다음으로는 회사와 제휴된 은행에서 제공하는 신용대출 프로그램이 있었다. 신용등급에 관계없이 2억 원까지 가능하다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동네 은행을 찾아 상담을 받던 중, 대출계 차장님께서 내 신용점수가 생각보다 낮다는 사실을 알려주셨다. 신용카드를 주로 사용하는 소비 패턴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사회 초년생일수록 체크카드 위주의 소비습관이 신용 관리에 더 도움이 된다고 조언해주셨다. 그 조언이 유독 따뜻하게 기억에 남는다. 그날 이후 나는 ‘신용’이라는 것이 단순한 점수만이 아니라, 앞으로의 투자와 대출에서 얼마나 중요한 자산이 되는지를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그렇게 최종적으로 내가 마련한 아파트 매매 예산은 다음과 같다.
- 내가 모은 돈: 1억 원
- 생애최초 디딤돌 대출 (연 2.5%): 1억 원
- 회사 연계 신용대출 (연 3.4%): 2억 원
- 인테리어 비용 (부모님 대출): 2천만 원
‘1억 원을 가진 내가 4억 원짜리 집을 살 수 있구나’
머릿속에서 계속 같은 말이 맴돌았다. 하지만 계약금과 중도금, 잔금이 순차적으로 이체될 때도, 은행에서 대출 승인 연락이 왔을 때도 실감은 나지 않았다. 서류 속에서 오가는 거대한 숫자들은 현실보다 비현실에 가까웠다.
그 대신 매달 빠져나가는 고정지출은 실감 그 자체였다. 계에 붓는 돈 200만 원, 디딤돌대출 상환금, 신용대출 이자까지 포함하면 월급에서 빠져나가는 돈은 내 예상보다 훨씬 많았다.
지출이 늘어나면서 자연스럽게 소비습관도 바뀌었다. 기존에 사용하던 신용카드를 해지했고, 체크카드로만 지출을 관리하기 시작했다. 다만, 신용카드를 해지하는 과정에서도 예상하지 못한 지출이 있었다. 다음 달 빠져나갈 비용까지 전부 선결제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순간, 나는 다시 한 번 신용카드의 무서움을 실감했다.
그렇게 나는 30대를 자산 4억 원, 순자산 1억 원, 대출 3억 원으로 시작하게 되었다.
'대출이자'라는 고정지출이 조금 늘어난 만큼, 직장에서 대리가 되며 소득도 딱 그만큼만 늘었다.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아주 이따금씩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를 듣다 보면 ‘내가 시간의 흐름에 무딘 건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다 이내 다시 현실적인 고민들로 머릿속을 채우며 하루하루를 보냈다.
2014년 내가 홍보담당으로서 맡은 첫 업무는 회사의 사보를 제작하는 업무였다. 이 낯선 업무가 온전히 내 일이 될 때쯤 회사의 공식 디지털 채널들을 하나둘씩 론칭하면서 일에 재미를 붙이던 시기였다. 새로운 채널을 론칭하고, 홍보 업무의 매뉴얼을 만들고, 사내기자단을 운영하면서 내 커리어패스가 넓어지고 깊어지는 느낌이 참 좋았다.
그렇게 3년이라는 시간이 빠르게 흘렀다. 2020년, 입사 7년차였던 내 삶의 중심은 늘 업무였다. 아침에 일어나 출근하고, 퇴근 후에는 피곤한 몸을 이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회사는 경기도 동탄에 있었고, 집에서 차로 40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다소 피곤했지만 충분히 감내할 만한 출퇴근 거리라 생각했다.
그 무렵 회사는 또 다른 계열사와 합병되며 내부적으로 많은 변화가 있었다. 새로운 홍보담당자들과 한팀이 되었지만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여전히 비슷했다. 일에 대한 애정은 있었지만, 조금씩 혼자 애쓴다는 느낌도 들기 시작했다.
이 느낌은 점차 커지고 단단해지면서 매너리즘으로 자리잡았다. 업무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할 수 있기에 필요했던 출퇴근 시간은 점점 피로감이 쌓일 뿐이었다. 그 피로는 일상과 감정까지 영향을 미쳤다.
이런 고민이 무르익어 갈 무렵, 부동산 시장은 예측할 수 없는 속도로 움직이고 있었다. 2018년과 2019년까지의 점진적인 상승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지만 2020년이 되자 시장의 질서가 완전히 바뀐 걸 문득 깨달았다. 코로나 팬데믹의 서막이었다.
부동산 시장은 전국적으로 과열되기 시작했다. 정부는 법인 대출과 전세자금대출을 강도 높게 규제했고, 다주택자에 대한 취득세·양도세·보유세 중과도 시행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정책들과는 무관하게 서울과 수도권의 중저가 아파트 가격은 폭주했다.
아니, 이게 말이 돼?
어떤 지역은 몇 달 만에 몇 천만 원이 오르는 걸 보며, 나는 그저 어리둥절할 뿐이었다. 현실감 없는 속도였다. 매수자 우위 속에 신고가가 속출했고, 매물이 나오면 기다렸다는 듯 거래가 이루어졌다.
회사에서는 “옆 팀 대리는 회사 인근에 집을 세 채나 샀다더라”, “얼마 전 퇴사한 사원은 비트코인으로 10억 넘게 벌었다더라”는 이야기들이 돌았다. 점심시간이면 누구랄 것 없이 ‘어떤 지역의 부동산이 더 오를 것인지’에 대한 대화가 이어졌다.
내가 서 있는 세상은 이미 바뀌고 있었다. 사람들은 소득이 아니라 ‘자산을 얼마나 늘리느냐’를 기준으로 미래를 설계하고 있었다. 직장에서 밤낮으로 일하며 상사로부터 인정을 받고 매년 조금씩 오르는 연봉에 만족했던 나였지만, 그보다 몇 배 빠른 속도로 부동상 자산이 늘어나는 걸 인정해야만 했다.
이 시기 동안 내 순자산은 매년 평균적으로 7~80%씩 상승했다. 대출받은 3억 원은 여전히 제자리였지만, 내 자산은 계속해서 늘어났다. 하지만 이건 철저히 운이었다. 처음 집을 살 땐 투자 목적도 아니었고 상승장을 예측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시장은 그런 나의 우연한 선택에 대한 뜻 모를 보상을 주었다.
나 왜 이렇게 열심히 일하고 있는 걸까?
나는 내 일을 정말 좋아했고, 커리어를 쌓는 과정도 즐거웠다. 하지만 그에 대한 보상은 지극히 ‘평균적인 속도’로만 늘어났다. 결국 직장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내가 쌓아가는 근로소득보다 시장이 키워주는 자본소득의 속도가 훨씬 빠른 시대였다.
마침내 나는 인정을 해야만 했다. 직장을 다니는 가장 큰 이유는 ‘돈’이라는 사실을. 심플하지만 더 명확했다. 일에 대한 만족감이 분명히 있었지만, 직장인으로서 내 온전한 미래를 주도적으로 설계하는 건 위태위태해 보였다. 그제서야 내 일상 속 작은 불편들이 크게 다가왔다.
나는 나 자신이 대해 얼마나 생각하 본 것일까? 내가 좋아하는 것들은 무엇이고, 나는 어떤 것에서 행복감과 만족감을 느낄까? 나는 왜 이 길을 선택한 것일까? 생각에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나는 초등학생 시절부터 선생님의 칭찬을 받기 좋아하는 모범생이었다. 하굣길에 어머니에게 “오늘은 몇 번 발표했고, 몇 번 칭찬받았어” 하고 말하던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그런 내가 커서 중고등학교를 거쳐 대학교를 졸업하고, 안정적인 길로 여겨지는 대기업에 입사했다.
그 과정 속에서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을 쟁취하기보다는 행복을 적당히 안고 일부는 유예한 채 ’사회적 안정’을 선택했을지도 모른다.그저 가장 대중적인 선택에 발을 올려두었던 건 아닐까. 5년 후, 10년 후, 15년 후에도 내가 여전히 직장인이라면 나는 어떤 삶을 살고 싶을까?
그 질문에 다다르자, 지금 내 삶의 경로가 나에게는 아무래도 맞지 않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내가 가장 갈구하는 가치는 ‘삶의 자유’였고, 내 자유로운 시간을 ‘나와 나의 소중한 사람들’에개 온전히 쓰고 싶었다.
팬대믹의 등장과 함께 내 삶의 소망도 경제적 자립에 서서히 과녁을 맞추게 되었다. 그 즈음 나는 어느 와인클래스에서 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다.
(다음 편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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