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에서 나는 선배 한 명 밑에서 일을 배웠다.
그 사람은 나보다 한참 나았다.
숫자를 보는 눈이 빨랐고, 손이 야무졌고,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했다.
회식 자리에서 선배는 가끔 가게 하나를 이야기했다.
퇴근길에 동네 사람들이 들러 국수 한 그릇 먹고 가는, 작고 따뜻한 가게.
그 이야기를 할 때면 선배의 눈빛이 잠깐 달라졌다.
나는 그 눈빛을 아직도 기억한다.
선배는 성실했다.
매달 적금을 부었고, 쉬는 날이면 시장을 돌며 재료값을 수첩에 적는다고 했다.
"1년만 더. 2년만 더." 그 '조금만 더'가 입버릇이었다.
그런데 그 돈은 늘 가게가 아닌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어느 해는 아버지가 편찮으셨고, 다음 해는 동생 보증금이 모자랐고, 또 한 해는 살던 집 전세가 올랐다.
그때마다 선배는 모은 돈을 헐었다.
그리고 다시 0원에서 적금을 부었다.
나는 그게 그냥 운이 나쁜 거라고 생각했다.
한참 뒤에야 알았다. 그건 운의 문제가 아니었다.
사실, 한동안은 나도 선배와 다르지 않았다.
지방에서 7천만 원으로 투자를 시작하던 시절, 나도 모은 돈을 자꾸 헐었다.
급한 일은 늘 생겼고, 통장은 늘 처음으로 돌아갔다.
그러다 우연히 연구 하나를 봤다.
2013년, 하버드와 프린스턴의 학자들이 인도의 사탕수수 농부들을 조사했다.
이 농부들은 1년에 한 번, 수확이 끝나야 돈을 받는다.
그래서 수확 전엔 쪼들리고, 수확 후엔 잠깐 여유롭다.
같은 농부에게 똑같은 지능 검사를 두 번 시켰다. 수확 전, 그리고 수확 후.
결과는 분명했다.
같은 사람인데, 쪼들리던 수확 전의 점수가 눈에 띄게 낮았다.
IQ로 치면 13점쯤. 밤을 꼬박 새운 사람의 머리 상태와 비슷했다.
가난이 사람을 멍청하게 만든 게 아니다.
당장의 걱정이 머릿속 한 칸을 늘 켜둔 채 돌아가게 만들 뿐이다.
멀리 내다볼 자리가, 그만큼 줄어든다.
그제야 선배가 다시 보였다. 그리고 그때의 나도 다시 보였다.
선배에게도, 그때의 나에게도 부족했던 건 의지도 재능도 아니었다.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돈'이 단 한 번도 없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딱 하나를 정했다.
원금에는 손대지 않는다.
생활이 아무리 그 돈을 불러내도, 한 칸은 끝까지 건드리지 않고 두기로 했다.
처음엔 별일 없어 보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니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손대지 않은 돈은 알아서 불어났고, 자꾸 헐어 쓰던 돈은 늘 제자리였다.
복리는 시간이 만들어주는 마법이라는데, 그 마법엔 조건이 딱 하나 붙더라.
원금에 손대지 않을 것.
그렇게 10년이 지났다.
지방에서 시작한 7천만 원은, 어느새 나를 전혀 다른 자리에 데려다 놓았다.
내가 갑자기 똑똑해진 게 아니다.
그저 머릿속 한 칸을, 비워둘 수 있게 됐을 뿐이다.
생각해보면 불어날 시간을 빼앗긴 건 돈만이 아니었다.
선배의 꿈도, 선배가 될 수 있었던 무언가도 매번 처음으로 되돌아갔다.
누군가는 매달 남는 돈으로 꿈을 준비하고, 누군가는 매달 모자란 돈으로 생활비를 준비한다.
같은 월급날을 맞아도, 두 사람이 사는 시간은 전혀 다른 속도로 흐른다.
그러니 큰돈이 아니어도 좋다.
얼마든 괜찮으니, 절대 건드리지 않는 한 칸을 먼저 만들자.
이름을 붙여도 좋다.
'이건 없는 돈'이라고.
그 한 칸이, 언젠가 너 대신 멀리 내다봐 줄 거다.
선배는 지금 잘 지낸다.
회사에서 인정받고, 가정을 지키고, 자기 삶에 만족하며 산다.
그러니 이건 실패한 사람의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단단하게 살아낸 사람의 이야기다.
다만 나는 가끔 그 국수 가게를 상상한다.
선배 눈빛이 잠깐 환해지던, 끝내 열리지 못한 그 가게를.
열어보지 못한 가게는 어디에도 기록되지 않는다.
우리가 보는 건 그가 이룬 것뿐이고, 그가 이룰 수 있었던 건 아무도 보지 못한다.
나는 이제 아이를 키운다.
큰 부자가 되라고 가르치고 싶진 않다.
다만 한 번쯤은, 생활비가 아니라 꿈을 먼저 셈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한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시간.
조급함 없이 천천히 고를 수 있는 선택지.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통장 잔고가 먼저 대답하지 않아도 되는 삶.
내가 돈을 모으는 이유는 거기에 있다.
더 좋은 차, 더 큰 집이 아니라, 원금을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여유.
그 여유가 생기는 순간, 우리는 비로소 생활비가 아니라 꿈을 준비하기 시작한다.
너에게도, 건드리지 않아도 되는 한 칸이 생기길.
그 한 칸이 언젠가, 너의 국수 가게를 지켜주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