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저녁을 먹고 나오는 길이었습니다.
골목에서 누가 저를 알아보고 인사를 하시더라고요.
작년에 현장임장 강의를 수강생분이었습니다.
영등포에서 5년째 전세로 살고 계신 맞벌이 부부의 남편분이었는데요.
반갑게 안부를 나누는데, 표정이 어둡길래 물었더니 얼마 전 집주인에게 연락을 받았다고 합니다.
“이번 재계약 때는 보증금 1억을 올려야 할 것 같아요.”
길 한복판에서 그분이 저를 붙잡고 하신 질문이 아직도 기억에 남습니다.
"2년 전에는 역전세 뉴스가 나오길래, 저는 전세가 제일 안전한 선택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지금은 매물 자체가 없다고 하네요. 제가 뭘 잘못한 걸까요?"
잘못한 건 없습니다. 다만 시장이 바뀌었는데, 판단 기준을 안 바꿨을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오늘 이 글을 쓰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지금 겪고 있는 전세난은 본편이 아니라 예고편이기 때문입니다.
지금부터 그 근거가 되는 숫자 세 개를 보여드리겠습니다. 숫자 세 개만 기억하시면 됩니다.
17,197 / 91% / 126,000
첫 번째 숫자, 17197. 2027년 서울 신축이 3분의 1로 줄어듭니다
한국부동산원과 부동산R114가 함께 발표한 자료를 보면, 2027년 서울 아파트 입주예정물량은 1만 7,197호입니다.
이 숫자가 감이 잘 안 오실 수 있는데요.
서울에서 한 해에 필요한 적정 입주물량이 약 4만 5,000호로 평가받습니다.
필요한 물량의 3분의 1만 들어온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포인트가 하나 더 있습니다.
서울은 이제 빈 땅에 아파트를 짓는 도시가 아닙니다.
입주물량의 87%가 재개발·재건축, 즉 정비사업에서 나옵니다.
다시 말해 정비사업이 멈추면, 서울 공급은 그냥 멈춥니다.
그런데 지금 그 정비사업이 입구에서 막혀 있습니다.
두 번째 숫자, 91%. 이주하고 싶어도 못 하는 조합들
재건축 아파트가 신축이 되려면 순서가 있습니다.
이주 → 철거 → 착공 → 준공
첫 단추가 '이주'입니다. 그리고 이주하려면 조합원에게 이주비 대출이 나와야 합니다.
그런데 작년 6·27 대책으로 이주비 대출 한도가 6억으로 묶였고, 10·15 대책으로 LTV가 70%에서 40%로 줄었습니다.
결과가 어떻게 됐을까요.
서울시 자료 기준, 올해 이주를 앞둔 정비사업 구역 43곳 중 39곳(91%)이 이주비 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부족한 돈은 조합이 '추가 이주비'로 메워야 하는데, 이 금리가 최대 7.0%입니다. 1억을 5년 빌리면 이자만 4,250만 원입니다.
이주가 밀리면 철거가 밀리고, 철거가 밀리면 착공이 밀리고, 착공이 밀리면 입주가 밀립니다.
2027년 1만 7,197호라는 숫자조차, 더 줄어들 수 있는 숫자라는 뜻입니다.
실제로 작년 8월 예측치와 비교하면 수도권 입주물량은 이미 7,000호가량 하향 조정됐습니다.
세 번째 숫자, 126,000. 짓는 것보다 부수는 게 많습니다
마지막 숫자가 제일 무겁습니다.
2026년부터 2031년까지 서울에서 철거되는 주택은 약 22만 1,000가구. 같은 기간 완공되는 신축은 최대 9만 5,000가구.
약 12만 6,000가구가 순수하게 감소합니다.
집이 늘어나는 속도보다 사라지는 속도가 빠른 도시. 지금 서울이 그렇습니다.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얹어집니다.
철거를 위해 이주하는 조합원과 세입자는 어디로 갈까요? 주변 전월세 시장입니다.
공급은 줄어드는데, 전세 수요는 오히려 쏟아지는 구조입니다.
이미 조짐은 나오고 있습니다.
서울 아파트 전셋값은 매주 0.3%대 상승을 이어가고 있고, 아파트에서 밀려난 수요가 옮겨가면서 서울 오피스텔 전셋값 상승폭은 4년 만에 최고 수준입니다.
전세 살던 사람이 오피스텔로 밀려나는 시장. 이게 예고편의 첫 장면입니다.
"그럼 지금이라도 집을 사야 하나요?"
여기까지 읽으신 분들 대부분이 이 질문을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조금 다르게 답합니다.
공급절벽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집 없는 사람이 아닙니다. '기한 없이 사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이냐면요.
집값이 언제 얼마나 오를지는 저도 모르고, 그 누구도 모릅니다.
그런데 딱 하나, 확정된 미래가 있습니다.
당신의 전세 만기일입니다.
2027년 공급절벽은 달력에 적혀 있고, 당신의 만기일도 달력에 적혀 있습니다.
이 두 날짜가 겹치는 순간을 아무 준비 없이 맞는 상황. 그게 최악의 시나리오입니다.
시장 타이밍은 예측의 영역이지만, 내 만기일은 준비의 영역입니다.
그래서 오늘 액션은 '집을 사라'가 아니라 '내 달력부터 확인하라' 입니다.
전월세 살고 있다면, 이번 주에 할 일 3가지
1. 만기일과 갱신권부터 꺼내 보세요
계약서를 열고 두 가지를 확인합니다.
만기일이 언제인지, 그리고 계약갱신청구권을 썼는지 안 썼는지.
갱신권이 남아 있다면 인상률 5% 상한으로 2년을 벌 수 있습니다.
단, 이 2년은 '버티는 시간'이 아니라 '준비하는 시간'입니다.
갱신권을 이미 썼다면, 다음 만기는 시세대로 맞아야 합니다.
준비 시계가 그만큼 빠르게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2. 내 보증금으로 갈 수 있는 곳, 리스트를 만드세요
지금 서울 아파트 평균 매매가는 15억 8,000만 원, 평균 전셋값은 7억 원.
격차가 약 8억 9,000만 원입니다.
이 격차만 보면 내 집 마련이 불가능해 보이지만, 평균의 함정에 속으면 안 됩니다.
서울과 수도권에는 여전히 보증금에 감당 가능한 대출을 더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존재합니다.
지금 사라는 말이 아닙니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선택지'를 숫자로 확인해두라는 말입니다.
후보 지역 3곳을 정하고, 주말에 한 번씩 직접 가보세요.
선택지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은 같은 시장에서 완전히 다른 결정을 하게 됩니다.
3. 최악의 시나리오를 미리 계산해두세요
다음 만기에 보증금이 10~20% 오른다면 얼마가 필요한지, 그 돈이 없다면 월세 전환 시 월 부담이 얼마인지 지금 계산기를 두드려보세요.
전세가 오르면 월세는 따라 오릅니다.
숫자를 미리 아는 사람은 통보를 받아도 협상을 하고, 모르는 사람은 통보를 받는 순간 끌려다닙니다.
예고편이 끝나기 전에
그날 길에서 만난 그분과는 10분 간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보증금 1억 인상 통보에 밤잠을 설쳤지만 ‘어떻게 하지’라고 멈춰있지 않고, 주말마다 임장을 다니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시장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분의 달력이 바뀌었을 뿐입니다.
2027년은 옵니다.
입주물량 1만 7,197호도, 감소 12만 6,000가구도 이미 달력에 적혀 있는 숫자입니다.
본편이 시작되기 전에, 당신의 달력부터 펴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