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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 250 직장인도 가능한 너나위의 부동산 기초 로드맵 - 24년 10월 최신
너나위
평소 오전에는 시세를 조사하고 유튜브로 뉴스를 보거나 기사를 읽는다. 이 과정에서 더 확인이 필요한 것들이 생기면 전화를 하거나(부동산에) 관련된 책을 읽거나 다른 것들을 파고 들어가거나 한다.
강의에서 방송에서 더 잘 전달해야 하는데, 이건 벼락치기로 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평소에 꾸준히 적립해두어야 한다.
오늘도 그렇게 콘텐츠들을 살피다가 우연히 이런 썸네일이 눈에 들어왔다.
49분 짜리 영상이라 잠깐 고민하다가 예전에 임장하면서 길에서, 편의점에서, 식당에서 만났던 그들의 모습이 떠올라 눌러보았다. 그리고 참 많이 놀랐고, 미안했다.
원래 오늘은 글을 쓸 계획이 없었는데 오늘 조금 더 늦게 자더라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 월부닷컴에 찾아오시는 분들 중에도 혹시나 지금 좌절 속에 헤매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니까.
한 명이라도 용기를 얻었으면 하는 마음이다.
|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
영상은 현재 '쉬고 있는 청년들'과의 인터뷰로 시작한다.
각양각색의 이유가 있다. 일이 나와 맞지 않아서,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했어서, 사회생활 중에 인격적인 상처를 입게 되어서 등등.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구... 세상은 원래 힘든 것인데... 너무 일찍 포기한 것 같아 안타깝네'
어떤 사람들은 사회에 적응하지 못한 그들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누구나 그 정도는 힘들다고, 멘탈이 약하니 그런 거라고 말한다. 쓴 사람의 인격과 세계관이 보이는 조롱 섞인 댓글도 중간 중간 보인다. 착잡한 마음이 들었지만 방송을 계속 시청했다.
이어서 방송에선 오래 쉬는 청년들이 본인의 삶의 방향을 상실하여 오는 어려움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 파생되는 문제들을 함께 보여준다.
쉬고 있는 청년들과 그들을 부양하는 부모들의 모습이 그것이다. 본인의 노후 불안 뿐 아니라 방황하는 30대 자녀까지 떠안아야 하는 우리 부모님들의 모습이 영상에 비춰진다.
5년 동안 방 밖으로 나오지 않은 아들과 한 지붕 아래서 카톡으로 대화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때 너무나 마음이 아팠다. 그 청년은 현재 회계사 시험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 나라의 경우 첫 취업을 잘 못 하게 되면 그 다음부터 소위 '커리어가 꼬인다'는 인식을 주기 때문에 청년들의 구직이 길어지고, 그 과정에서 은둔 고립으로 상황이 악화되는 경우가 많은 것이다.
이어서 한 전문가의 인터뷰가 나온다.
"은둔 고립 청년들의 1순위 원인은 채용 시장의 불안정성, 다양한 일자리가 계속 제공되는 사회라기보다는 3년 이상의 경력자를 대부분 뽑으면서 신입 직원이라고 회사는 생각하잖아요. 그러면서 사회는 밀어낸, 내가 부적응한 게 아니라 밀어낸 은둔을 사실은 비자발적으로 많이 시작한다고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보면서 '도대체 이 인터뷰는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란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이 상황의 진짜 문제, 그리고 청년들의 진짜 어려움은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곳이 없다'는 것이다. '사회가 이러니 이런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참 큰 일이네요'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렇게 실체가 없는 사회 탓을 한다고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그렇다고 온전히 개인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다. 70만이라는 수많은 사람이 그런 문제를 겪고 있다면 개인의 문제로 치부할 수 없는 일임은 당연한 것 아닐까? 한 두명이 감기에 걸렸다면 개인의 위생이나 건강관리를 탓할 수 있을지 몰라도, 70만명이 감기에 걸린 것은 전적으로 그들의 책임이라 할 수 없다.
부족한 내 생각에, 정말 중요한 것은 '그런 어려움을 겪게 되었을 때 이렇게 하면 상황 해결에 도움이 될 거야. 같이 힘내보자' 라고 도움을 줄 수 있는 곳이,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만약 월부닷컴을 찾는 분들, 혹은 주변 분들 중에도 지금 비슷한 어려움을 겪는 분들이 계시다면 먼저 이런 말씀을 드리고 싶다.
"인생을 살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 혹은 몇 차례 슬럼프나 암흑기를 겪게 됩니다. 그건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어찌 보면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다른 사람이 아무렇지 않게 잘 헤쳐나갔다고 해서 나는 모자란 사람이라 생각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 다른 사람은 내게는 아무렇지 않은 다른 일로 힘들어질 수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를 뿐입니다. 중요한 사실은 누구나 인생이란 긴 여정 중에 늪에 빠지거나 다리를 다치거나 열병을 앓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다시 좋아질 수 있는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행하는 것입니다"라고.
| 슬럼프에서 벗어나려면
이 글을 읽고 있는 누군가가 '아, 나만 그런 게 아니구나. 누구나 살다 보면 겪는 좌절을 나는 지금 겪고 있는 거로구나. 다시 나아질 수 있구나'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 내가 슬럼프에 허우적거릴 때 썼던 방법을 말해주고 싶다.
첫번째는, 밖으로 나가보는 것이다.
한 때 사람들이 두려워졌던 때가 있다. 안 그래도 내향형인 사람이기에 흔히 말해 '집돌이'였던 나는 일이 아니면 무조건 집 안에만 있었다. 집 안에 있으면 의지로는 어려운 것들이 생긴다. 책을 하루 종일 보기도, 일을 하루 종일 하기도 쉽지 않다. 벌러덩 드러눕기 일쑤다. 반나절만 그렇게 보내도 마음 속에서 엄격한 자아가 나를 호되게 야단친다. '너 오늘 하루 종일 정말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했구나'라고. 이게 반복되면서 점점 더 소극적으로 행동하게 된다.
환경이, 그리고 정신이 이처럼 폐쇄적으로 바뀌면 쉬운 결정도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된다. 자신만의 세계에 갇힌다는 건 이런 것이다. 남들이 보기엔 매우 쉽고 당연한 것조차 엉뚱하게 결정하는 일들이 생긴다. 이럴 때 자신감이 떨어지고 스스로를 낮춰보기 시작한다. '무기력 → 회피 → 실수 → 자책'의 악순환을 그리게 된다. 이 모든 것은 꽉 막힌 공간에 틀어박히며 일어나게 된다.
그래서 일단은 나가야 한다.
억지로 사람을 만나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또 다른 위축이나 후퇴를 불러일으킬 수 있으므로. 일단은 바깥 공기를 접해야 한다. 얼굴에 부딪치는 빗방울의 성가심을 느끼는 것도, 붕붕 시끄럽게 지나가는 버스 소리에 인상을 찌푸리는 것도, 뒤에서 딸랑 소리를 내며 달려오는 자전거를 피하는 일도, 우르르 무리지어 건너오는 횡단보도 반대편 사람을 조심스레 피해가는 것도. 모두 다 나를 구하는 행위라고 생각하고 일단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
두번째는, 말을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의 상태를 말해야 한다. 물론 이건 정말 어렵다. 우리는 속마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스스로 나약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 전 '나긋나긋'촬영하면서 '가는 말이 고우면 만만하게 본다'는 말이 유행이라는 나나님의 이야기를 듣고 요즘 우리가 얼마나 속마음을 말하는 것이 어렵고, 하다못해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자신을 약한 사람으로 보이게 할 것 같다는 걱정 속에 사는 지를 알게 되었다. 그러나 대부분 자신을 아끼는 사람은 있게 마련이다. 단 한 명이라도. 부모님이든 형제 자매든 아니면 친구든. 그런 사람들에게 자신의 마음을 말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머릿 속이 안개가 가득 찬 것과 같이 뿌연 상태가 된다. 사소한 것도 틀리고, 올바르게 하지 못하게 된다. 고장이 나는 것이다. 그러면서 더 스스로를 비하하고 낮추게 된다. 그러니 말해야 한다. 그러면 그들은 가만 듣고 당신을 안아줄 것이다. 아니면 어떻게 하냐고? 그건 다음에 이야기할테니 일단 해보자.
만약 내 주변 사람들은 말해도 핀잔이나 줄 것 같고, 심지어 그런 사람조차 정말 한 명도 없다면, 글을 쓰는 것도 방법이다. 나는 저 영상을 다 보고 처음엔 '실컷 사회 탓만 해놓고 이게 뭐야'란 마음이 들었지만 댓글을 보고 이내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저 영상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댓글로 자신의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하며 서로 격려하고 위로했기 때문이다. 그것 만으로도 참 좋은 방송이라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지금 너무 힘들다면 오히려 더 말을 하자. 내게 소중한 단 한 사람에게라도. 만약 그조차 없다면 좋은 사람들이 모인 곳에 댓글로 적어보자. 뜻밖의 선물을 받게 될 것이다(혹시나 안 좋은 댓글이 걱정된다면 일기장에라도 적어보자.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어디에나 있다. 참으로 딱한 사람들일 뿐이다)
마지막으로, '삶의 의미'가 아니라 '삶에서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이게 참 어렵다. 나도 여전히 미숙함을 고백한다. 그러나 반대로, 그렇기에 나보다 어린 나이에 이걸 훈련한다면 나보다 더 멋진 인생을 살 수 있을 것이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라는 책이 있다. 힘들 때 읽었던 책인데, 작가는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의 수용소에서 지옥을 경험했던 사람이다. 요즘 속된 말로 '인류애가 사라진다'라는 표현의 끝이 어울리는 곳이 당시 나치의 수용소이다. 그는 그 곳에서 상상을 초월하는 강제노역과 인격살인에 가까운 멸시, 괴롭힘을 겪는다. 실제로 부모, 형제, 아내가 모두 그 수용소에서 죽는다. 지금이야 나치가 패망한 것이 역사적 사실이 되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그 지옥에서 가족을 모조리 잃는다면 어떤 심정일까? 그럼에도 그는 거기서 살아남았고 그 과정에서 인간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깨닫게 된다. 그 책엔 그런 그의 삶에 대한 깨달음이 담겨 있다.
나도 힘든 시절이 있었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나는 왜 살아야 할까?,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와 같은 고민을 했다. 돌아보면 충분히 좋은 질문이었다. 그러나 쉽사리 답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데 저 책에서 빅터 프랭클은 '삶의 의미'를 찾기보다 '삶에서의 의미를 찾으라' 말한다.
내가 물었던 '나는 왜 살아야 할까?, '내가 왜 열심히 살아야 하는가?'는 삶의 의미를 찾는 질문이다. 그러나 내가 오늘도 시세를 조사하고, 강의를 준비하고, 방송을 촬영하고, 글을 쓰는 것은 '2024년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을 도우며 살고 싶다'는 '삶에서의 의미'에 맞닿아 있는 행동이다.
한 관광객이 길에서 교회를 짓고 있는 인부에게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물으니, 한 인부는 '보면 모르시오? 벽돌을 쌓고 있소'라고 말했다. 다른 인부는 '교회의 외벽을 건설중이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인부는 '신의 성전을 올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마지막 인부가 '삶에서의 의미를 찾은 사람'이 아닐까? 그런데 그도 자신의 삶이 무엇인지는 답하기 쉽지 않을 것이다.
만약 지금 고립된 것 같다면, 숨고 싶다면, '사는 게 뭘까?'와 같은 어려운 생각은 잠시 접어두자. '살고 싶지 않다'는 더 어려운 생각도 그만 두자. 그저 내 눈 앞에 놓여진 것들, 조금만 몸을 일으킨다면 할 수 있는 것들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만 생각해보자.
밖으로 나가는 것, 내 편에게 내 상태를 말하는 것은 '나를 스스로 구원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걸 나는 말해주고 싶다. '귀찮지만 해봐야지'가 아니라.
방 안에, 집 안에, 혹은 내 마음 안에 스스로를 고립시킨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이 글을 보고 힘을 낼 수 있다면 나는 오늘 좋은 삶을 살았으리라 생각한다. 그것이 이 글이 내 삶에서 차지하는 의미이다.
※ 고립 은둔 청년이 아닐지라도, 혼자서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신 모든 분들께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글을 읽으신 분들 중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으시다면 이 글을 공유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부동산이나 재테크 글을 기대하시는 분들께는 양해의 말씀을 구합니다. 다음 글을 통해 적어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좋은 글을 남겨주신 멤버에게 댓글은 큰 힘이 됩니다. 응원 댓글로 감사함을 나눠주세요. 😀
댓글 0
김인턴 : 감사합니다 너나위님♡
김뿔테 : 너나위 멘토님 감사합니다. 힘을 내서 열심히 살겠습니다~!
귀연당 : 너나위님 따뜻한 글 감사합니다
루공 : 감사합니다 멘토님
파도타기8 : 너나위님 감사합니다!!
바니바니당근 : 너나위님 감사합니다🩷
잔잔한등불 : 너나위님 감사합니다!!
그린아이 : 너나위님 마음을 울리는 좋은글 감사합니다 🩷🧡
쩡봉위 : 멘토님 감사합니다
준삭스 : 위로의 말씀 감사합니다 멘토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