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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中 | 행복을 소리라고 한다면, 이 소리를 만드는 악기는 인간의 뇌다. 이 악기가 언제, 왜, 무슨 목적으로 소리를 만들어 내는지를 알아야 행복에 대한 감을 잡을 수 있다. | 나에 대해서 더 잘 알아야 한다고 생각은 들지만, 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떻게 하는건지는 아직 잘 모르겠다. 스스로에 대해서 다들 몇 % 알고 있을까? |
자연은 기막힌 설계를 했다. 내 생각에, 개에게 사용된 새우깡 같은 유인책이 인간의 경우 행복감(쾌감)이다. 개가 새우깡을 얻기 위해 서핑을 배우듯, 인간도 쾌감을 얻기 위해 생존에 필요한 행위를 하는 것이다. | 다소 원초적인 쾌락에 매몰된 건 아닐까? 행복 = 쾌락(쾌감) 이라는 명제는 쉽게 동의하기는 어렵다. | |
행복의 핵심은 부정적 정서에 비해 긍정적 정서 경험을 일상에서 더 자주 느끼는 것이다. 이 쾌락의 빈도가 행복을 결정적으로 좌우한다(Diener, Sandvik, & Pavot, 1991) | 행복은 크기보다는 빈도에 의해서 우리에게 더 크게 작용한다. 소확행이 괜히 나온게 아니다. 그럼 나에게 있어서 소소하지만 작은 행복들은 무엇인가?? | |
뱀, 절벽, 사기꾼, 썩은 음식. 치명적인 위협들이다. 이때 우리의 뇌는 두려움이나 역겨움 같은 불쾌의 감정을 유발시켜 ‘위험하니 피하라’라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 하지만 아이들은 이런 개념을 모르기 때문에 뱀 앞에서도 태연하게 뱀을 만지려고 하는 모습을 보인 실험 결과도 있다. 결국 쾌와 불쾌도 사람들이 만들어낸 하나의 관행이 아닐까? 획일화될 수 없다. | |
생존에 유익한 활동이나 생각을 하고 있을 때, 그 일에 계속 매진하라고 알리는 것이 쾌의 본질적 기능인 것이다(Nesse & Ellsworth, 2009). | 계속적인 긍정적인 경험이 (성공경험) 연속적인 성공 혹은 성과를 이어간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선택을 했고 대응하면 되니깐.. 성공과 실패로 단정지을 순 없다. | |
인간의 본성을 압축한다면 나는 “The ultimate SOCIAL machine”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사회성은 인간의 생사를 좌우하는 가장 독보적인 특성이다. 최근 여러 분야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주장하는 결론이다. | 단순히 인간이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이 아니라, 원초적인 원인에서도 주변인의 존재는 필수적이다. 어떻게 보면 나도 주면 환경이나 사람들에 의해서 많이 변화했던 것 같다. 그것이 긍정적인 변화이든, 부정적인 변화이든 | |
인간을 가장 인간스럽게 만드는 뇌. 한마디로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기 위해 뇌가 발달했다는 것이다. 인간이 인공위성을 띄우고 힉스입자를 발견했지만, 이런 위업들은 사실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똑똑해진 뇌에서 나온 부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 ||
우리는 사회적 인간의 유전자를 받았고, 그것을 통해 ‘사회적 생존 비법’을 전수받았다. 이 ‘생존 비법 패키지’를 뜯어 보면 두 가지 중요한 내용물이 나온다. 하나는 ‘고통’이라는 경험이다. 고통을 경험하지 못하는 동물은 오래 살 수 없다. 다리에 박힌 못이 아프지 않으면 치료하지 않을 것이고, 결국 목숨까지도 잃을 수 있다 | 즉, 실패든 성공이든 경험이 중요하다. 각각의 경험에서 무엇을 내 것으로 만들어내느냐의 차이가 다를뿐이지 | |
다리가 잘려 나가는 것만큼 인간의 생존을 위협한 것이 집단으로부터 잘려 나가는 것이었다. 이때 뇌는 ‘사회적 고통’이라는 기제를 사용해 그 위협을 우리에게 알렸다. 외로움, 배신감, 이별의 아픔. 인간관계에 금이 가는 신호가 보일 때 뇌는 이런 마음의 아픔을 느끼도록 했고, 그 덕분에 더 치명적인 고립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다. | 물리적인 고통보다 더 오랫동안 흉터로 남아서 나에게 당시의 기억을 상기 시켜주는건 정신적인 (더 정확히는 사람과 사람 간의 갈등으로 인한) 것들이었다. | |
배고픈 사냥꾼은 눈앞에 토끼가 나타날 때, 토끼 고기가 맛있는 냄새를 풍기며 익어 갈 때, 한 입 뜯어 먹을 때 행복감을 느낀다. 이런 깨알 같은 쾌감들을 흠뻑 느껴야 또 사냥을 나가게 되고, 이렇게 사냥을 꾸준히 해야만 생존할 수 있다. | 이 과정이 결국 시각화의 한 과정이고 RAS 아닐까? 쾌락적인것 (긍정적인 영역), 이런 것들은 연속적으로 다가올때 그 파급력은 더 배가되는 것 같다. | |
행복감을 발생시키는 우리 뇌가 이처럼 사람에 ‘중독’되어 있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 된다. 그래서 사회적 경험과 행복은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다. 사회적 경험이 행복에 중요한 것은 물론이고, 나는 한발 더 나아가 행복감(쾌감)은 사회적 과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존재하게 되었다고까지 생각한다. | 다소 기분이 씁쓸하지만 틀린 이야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궁극적으로 나의 삶 (투자자의 삶) 역시 부의 장출이라는 부분에서 큰 목적성을 갖고 있지만, 결국 사회적으로 더 질 높은 삶을 살기 위함이 아닐까? | |
돈을 생각할수록 카페에서 다른 사람과 대화를 덜 하고(Mogilner, 2010), 어려움을 당해도 다른 사람의 도움을 사양한다는 연구 결과들이 있다(Vohs, Mead, & Goode, 2006). | 어떤것에 매몰 혹은 몰입이 되면 확실히 주변에 대해서 잘 살피지 못한다. 특히 그것이 돈에 관계되어 있다면 더 강화되는 것 같다. | |
행복한 사람들은 이런 ‘시시한’ 즐거움을 여러 모양으로 자주 느끼는 사람들이다(Diener, Sandvik, & Pavot, 1991). | 작은 것들 혹은 사소한 것들에 대한 소중함을 알고 행동하는 게 더 행복한 삶을 만들어 갈수 있다. 하지만 알면서도 잘 해내기 어려운 영역이다. | |
객관적으로 얼마나 많이 가졌느냐보다 이미 가진 것을 얼마나 좋아하느냐가 행복과 더 깊은 관련이 있다(Diener, Lucas, Oishi, & Suh, 2002). | 갖고 있는 것에 대한 소중함을 잊지말자. | |
긍정·부정 정서의 독립성(independence)이라고 하며(Diener&Emmons, 1984), 정신 병리에 몰두했던 심리학이 행복 연구를 시작하게 된 이론적 배경이다. 이 말을 쉽게 푼다면, 불행의 감소와 행복의 증가는 서로 다른 별개의 현상이라는 것이다. | 일부 개연성은 있지만 같은 선상에 있는 영역은 확실히 아니다. | |
‘becoming(~이 되는 것)’과 ‘being(~으로 사는 것)’의 차이는 상당히 크다. 재벌가 며느리가 되는 것(becoming)과 그 집안 며느리가 되어 하루하루를 사는 것(being)은 아주 다른 얘기다. 하지만 우리는 화려한 변신의 순간에만 주목하지, 이 삶을 구성하는 그 뒤의 많은 시간에 대해서는 미처 생각하지 않는다. | "Being" 기억해두자. 겉만보고 함부로 판단하지말자. | |
행복은 ‘한 방’으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쾌락은 곧 소멸되기 때문에, 커다란 기쁨 한 번보다 작은 기쁨을 여러 번 느끼는 것이 절대적이다. | 세기보다는 빈도를 늘려야 한다. 작은 것에 감사함을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범사에 감사하라. 나의 감사 일기가 어땠는지 (나의 감사)잘 상기해보자. | |
결국 무엇을 구매하느냐보다 구입한 물건 혹은 경험에 다른 사람이 개입되느냐가 관건이라는 것이다. | 구매라는 카테고리를 떠나서 무엇을 하든 (단. 성급한 일반화는 조심하자.) 혼자보단 둘, 들 보다는 셋. | |
이런 수직적인 문화에서는 구성원 각자에게 주어진 뚜렷한 역할이 있다. 자신의 칸 안에서 그 역할만 감당하면 된다. 가족으로서, 혹은 팀원으로서 주어진 역할 수행을 제대로 못 하면 주변의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그래서 나에 대한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 민감해질 수밖에 없고, 이렇듯 타인중심적인 생각은 행복 성취에 걸림돌이 되는 경우가 많다. | 내가 꼰대인가, 다소 비약이 좀 심한 것같다. 미국에서도 유럽에서도 수직적인 상하관계 구조는 존재한다. 그들도 개인 성과에 대한 눈치 그리고 남과의 경쟁은 똑같이 지르고 있다. | |
즉, 사람은 가장 절대적인 행복의 원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불행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 단순하게 표현한다면, 타인은 나에게 단맛과 쓴맛을 모두 느끼게 하는 존재다. 행복의 결정적 열쇠를 쥐고 있는 사람과의 관계가 일상에서 주로 어떤 맛으로 나타나느냐는 매우 중요한 문제다 | 원인을 외부 혹은 환경에서 찾아서 해결하는 방법도 좋도 방법이지만, 스스로에게 조금이라도 더 발전적인 방향을 도모한다면 내부에서 어떤 것을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해보는 것도 좋도 망법이라고 생각된다. 내가 항상 선 일수는 없다. | |
만남의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자유감의 중요성이 또다시 등장한다. 행복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만나는 사람들보다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 | 어떤 사람들을 일마만큼의 반도로 만나느냐와 아니냐의 차이는 행복 뿐만 아니라 삶 전반적인 수준에서 영향을 준다. | |
각자 자기 인생의 ‘갑’이 되어 살아 보는 것에 좀 더 익숙해지는 것이다. 세상이 나를 어떻게 보느냐보다 내 눈에 보이는 세상에 더 가치를 두는 것이다. | 삶에 대한 명확한 목적이 정립돼야한다. 그래야 내 삶에 대해서 보다 더 주인의식을 갖게 된다. | |
이들이 스스로 행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착각’이다. 사실 그가 관심을 둔 것은 정확히 말해 ‘가치 있는 삶(good life)’이지 ‘행복한 삶(happy life)’이 아니었다. 우리가 이 둘을 혼동하고 있는 것이다. 어쨌든 이런 초엘리트주의적 행복관의 잔재 때문에 좋은 삶과 행복한 삶이 뒤엉켜 있다. 행복도 오컴의 날로 정리할 필요가 있다. 행복은 가치(value)나 이상, 혹은 도덕적 지침이 아니다. 천연의 행복은 레몬의 신맛처럼 매우 구체적인 경험이다. 그리고 쾌락적 즐거움이 그 중심에 있다(Diener, Sapyta, & Suh, 1998). 쾌락이 행복의 전부는 아니지만, 이것을 뒷전에 두고 행복을 논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 행복과 가치는 책에서 언급했듯 충분조건과 필요조건의 관계와 같다고 생각한다. 좋다고 모든것이 행복한 게 아니다. 의외로 행복은 주변의 사소한 것들 속에 널리 퍼져있다. 우리가 찾지 못했을 뿐… | |
행복하기 위해 쾌락주의자가 되자는 말인가? 다소 그럴 필요가 있다. 특히 한국에서처럼 자신을 집단의 일부로 생각할수록 행복의 쾌락적 부분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다(Suh, Diener, & Updegraff, 2008). 그동안 우리는 내일이 없이 즐겁게 사는 여름 베짱이를 한심하게 생각하도록 세뇌받고 살았다. 두 가지 염려 때문에. 첫째, 쾌락주의자들의 즐거움은 저급하다. 둘째, 그런 삶의 말로는 한심할 것이다. 둘 다 근거 없는 염려다. 세상 모든 베짱이들이 루저가 된다는 증거는 없다. 수많은 최근 연구들에서 나오는 결론은 오히려 그 반대다. | 오롯이 순수한 나의 즐거움에 대해서 생각은 해보았나? 그것이 있다면, 나는 그것을 위한 삶을 얼마나 살아봤나? | |
행복이나 감정은 신비한 정신적 힘으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다. 보다 과학적인 시각은 감정의 출발지인 외부 변화에 두는 것이다. 즉, 생각을 바꾸는 것보다 환경을 바꾸는 것이 핵심 포인트다. 행복을 유발하는 구체적 상황들을 적극적으로 찾고, 만들고 늘리는 것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 나를 바꾼다 vs 주변을 바꾼다. 무엇이든 나에게 잘 맞는 방법이 있다면 그게 해답이지. | |
만약 집안 곳곳에 압정을 뿌려 놓는다면, 늘 가족들의 비명이 들릴 것이다. 비슷한 원리다. 행복 확률을 높이려면 즐거움을 주는 다양한 ‘행복 압정’들을 일상에 뿌려 놓아야 한다. 친구, 평양냉면, 커피, 메시의 패스, 바흐, 좋은 책, 새로운 경험, 운전을 위한 여행. 나의 행복 압정은 이런 것들이다. | ||
세계 50여 국가의 심리학자들이 최근 모은 자료가 있다. 연구 질문, “어떤 사람들이 자신의 성격을 바꾸고 싶어 하는가?” 결론은, 행복감이 낮은 사람일수록 자신을 바꾸고 싶어 했다(Baranski et al., 2021). 자신을 그대로 인정하고, 가진 것의 장점을 활용하는 것. 행복한 사람들의 특징이다. 한국인은 외모, 성격, 심지어 이름까지 바꾸는 것에 적극적이다. 행복한 사람들과는 반대 방향으로 일상을 걷는 것이다. | 나를 대표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들이 일반화되어 있고 대중화되어 있는 사회의 기준과 얼마나 다를까? 혹은 소규모로 속해 있는 사회 혹은 집단에서 부르짖는 가치와 얼마나 차이가 있나? | |
이렇게 행복에 대한 관심 수위는 변했고, 또 변할 것이다. 이 변화는 일상적인 삶의 내용과 관련 있다. 얼마 전까지 인류는 배고픔, 추위나 질병 같은 고통에 시달리며 살았다. 이 ‘결핍’의 시대를 사는 사람의 삶의 목표는 기본욕구의 충족이다. 실컷 먹고 자 보는 것. 이 과정에서 맛보는 대표적 경험은 쾌감이고, 이것의 이상적인 그림이 아마도 행복이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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