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파는 대치동 학원가로 아이를 통원시키기도 가까워서 강남에 입성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나쁘지 않은 선택지였다. 그리고 올림픽공원이 있어 녹지가 풍부하고 살기 편했다.
사진을 찍는 것도 몸과 마음의 여유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앨범을 정리하는 데 시간이 의외로 많이 걸렸기 때문에 엄마는 여력이 될 때마다 새 앨범을 사서 정리되지 않은 사진을 분류하고 한 장씩 앨범을 채워나갔다. 하지만 다 정리할 시간이 없었다. 박스에 마구잡이로 쌓여 있는 사진이 엄마에게는 마음의 짐이었던 것 같다.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될 때까지 우리는 예전에 살던 집으로 다시 돌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점점 더 등하교하기 힘든 먼 곳으로 이사를 갔다.
박정희 정부의 잠실지구종합개발기본계획이 본격적으로 시행되면서 잠실은 당시로서는 드물게 계획도시로 개발되었다.1 개발계획에 따라 건설된 대표적인 건축물이 잠실주공아파트와 잠실종합운동장이었다.
잠실주공아파트는 서울에서 보기 드문 대규모의 아파트단지로 최첨단 시설을 자랑했다.
강남은 전례 없이 역동적이고 유동적인 공간이었다. 있던 집이 사라지고, 없던 땅이 만들어지며, 대단지 아파트가 순식간에 들어서는 천지개벽의 풍경이 펼쳐졌다.
“허허벌판이라고 하는 거는 집이 한 채도 없다는 게 아니라 땅이 있는데 시에서 구획 정리를 했다는 거지. 집 짓는 사람, 집장사들이 전부 강동구로 모여서. 암사동부터 잠실까지 전부 공사장으로 퍼뜩 차버리지.”
정확히 집장사란 소규모 건설업을 하는 부동산 개발업자를 지칭하는 단어이다. 동네에 따라서 시대에 따라서 ‘연립업자’ ‘연립주택건축업자’ ‘영세주택업자’ ‘건축업자’ 등으로도 불렸는데 요즘은 ‘부동산 디벨로퍼’라고도 많이 불리는 듯하다.
특히 1973년 10월 석유파동은 집장사 수완에 있어 하나의 분수령이 되었다. 일시적으로 원유와 원자재 가격이 상승하면서 건축업계에 어려움이 들이닥쳤지만, 결과적으로 인플레이션이 증폭되면서 은행의 예금 자금이 부동산으로 흘러든 탓이었다.
1974년에서 1975년 사이 물가상승률은 무려 24%였다. 물가가 오르면서 돈의 가치가 떨어지자 은행 예금을 가진 사람은 전적으로 불리한 입장이 되었다. 대신 부동산과 같은 실물자산을 가진 사람의 수익은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커졌다.
1965년부터 1980년까지 소비자 물가가 8배 상승하는 동안, 도시 근로자소득은 28배 상승, 주택 가격은 39배, 그리고 택지 가격은 무려 108배 상승했다. 토지구획정리사업이 시행되면 일단 공사하는 비용이 들어가게 되니 기본적으로 땅값은 무조건 오르게 된다.
3종 일반주거지역에 속하는 고층 아파트단지가 완공되기 전에도 인근에서 4층 또는 7층의 다세대주택 분양을 알리는 현수막을 흔히 볼 수 있다. 1종, 2종 일반주거지역에 빠르게 들어서는 이러한 주택들이 소위 ‘집장사 집’이다.
국가에서 이러한 공사비용을 모두 충당할 수 없었기에 주택 개발은 공공과 민간의 합동으로 이루어지거나, 민간의 몫으로 넘어간다. 이 과정에서 기업에 세금 면제 등과 같은 특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1976년 천호대로가 준공되면서 서울의 중심부와 연결되었다. 한강에 지금처럼 다리가 많지 않았기에 강북으로 이동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여줄 수 있는 다리가 있다는 것은 주거지역을 선택하는 데 있어 큰 이점이었다.
제도는 언제나 현실을 따라가기 바쁘듯, 당시에 이러한 주거 형태에 대한 법률적 근거는 아직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단독주택’의 경우 집 한 채당 한 가구만 사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는 있었지만, 여러 가구가 한 집에 살고 있는 형태에 대한 법은 따로 없었던 것이다.
수요에 맞춰 중구난방으로 개조된 집들이 생겨났다. 특히 지하실은 규제를 피해 수익을 올릴 수 있는 꼼수 같은 공간이었다.
특히 1985년에는 다세대주택 건립 기준이 공식적으로 마련되면서 서민층 주택 공급에 가속도가 붙게 됐다. 다세대주택에 대한 융자 혜택이 주어졌고 건축법을 완화해주는 등 주택 공급을 독려하는 종합 지원대책이 마련되었다.
세대별로 설치가 가능해진 부엌과 화장실도 이용할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세입자들의 완벽한 가구 분리가 가능해진 것이다.
건설부는 다가구주택 표준설계도 6종을 각 시도에 보급하여 건축주가 표준설계도를 이용할 수 있게 해 건축비를 절감할 수 있도록 각종 정책을 내놓았다.
1980년대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전두환과 5공화국은 ‘주택 500만 호 건설’을 주택 정책의 캐치프레이즈로 삼고 있었다.
가장 작은 평수의 집에 전세로 들어갔다. 이전에 이사할 때 엄마는 나의 유치원, 초등학교 통학을 고려해 신중하게 집 위치를 골랐는데, 이번에는 그런 선택권이 주어지지 않았다. 정반대로 아파트단지에서 통학거리가 가장 먼 거리에 있는 동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내 통제를 못했던 게 힘들었던 거야. 내가 수입이 좋았을 때 내가 알아서 어떤 목표를 세워서 그만한 돈을 주면 단 얼마라도 저축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돈이 마르지 않으니까 샘솟는 우물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획 없이 살았는 거지. 아빠가 항상 사업해서 잘될 거라고만 생각했지 내리막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던 거지.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내 통제가 참 없었구나. 과소비하고. 그랬던 게 후회되고.”
특히 상당수 공직자들은 고금리로 인해 기업이 도산하고 국민이 고통을 받았던 것과는 달리 고율의 이자수익과 주식투자로 횡재를 한 경우도 많아 경제난이 이들에게 오히려 재산증식의 호재로 작용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너도나도 주식시장으로 달려들었다. IMF 외환위기 이전 수준으로 빠르게 회복된 것은 주가뿐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식시장의 흐름을 잡고 있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들과 투자정보를 알고 있는 고위공직자 등 소수의 보이지 않는 큰손들이었다.
옆자리에 앉아 있는 퇴직한 교감 선생님도, 장사를 하다가 말아먹어 새로 입사했다는 옆 팀의 자영업자 사장님도, 땅은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불패 신화’를 믿었다. 퇴직금은 사라지고, 권리금은 날아가지만, 내 명의의 땅은 계속 남아 언젠가는 가격이 오를 것이었다. 그것이 땅의 순리였다.
IMF 외환위기 직후 이자를 감당하기 위해 4억 원에 처분한 47평짜리 아파트는 2002년이 되자 매매가가 약 2배 가까이 뛰어 7~8억 원에 달했다. 부모님의 기대와 달리 우리가 다시 아파트단지로 돌아갈 수 있는 확률은 점점 희박해지고 있었다.
오랜 시간 동안 직접 경험해왔던 부동산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부모님은 과감한 결정 혹은 과도한 욕심으로 ‘올인’해버렸고 부모님의 이번 베팅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도시개발 과정을 살펴보니 그 이면에는 사람들의 투기를 부추기고 책임지지 않는 한국 사회가 있었다.
애매하게 가난할 바에는 아예 확실히 가난한 게 낫다는 것도 그때 배웠다.
어느 누군가는 퇴직금으로 노년을 보내며 등산을 가거나 골프를 칠 수도 있겠지만, 한국 사회에서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나는 다만 일흔이 넘은 엄마와 아빠가 더 이상 무언가 만회하겠다며 애쓰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어졌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라며, 이 사회가 그런 곳이라며, 힘든 사람이 우리뿐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며, 이런 순간도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하나의 경험이 될 거라며, 내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꿋꿋하게 이런 경험도 해야 되는 거라며, 우리 딸은 알아서 잘할 거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1970년대와 1980년대가 단독주택, 다세대주택만큼의 자본을 소유한 소규모 건설업자의 시대였다고 한다면, 1990년대와 2000년대는 브랜드 아파트로 대표되는 대기업 건설사의 시대였다. 그리고 2010년대는 초고층 빌딩의 시대가 됐다. 대규모 자본이 없으면 건물을 지을 수 없고, 자본이 있는 사람들만이 계속해서 건물을 지을 수 있는 소수의 승자 독식 시장. 이러한 구조가 비단 건설 시장의 모습만은 아닐 것이다.
한참 자신의 디자인 의도를 설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며 나는 이 건물을 보고 싶었다기보다는 이 주택을 설명하는 엄마의 모습을 보고 싶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카메라 앞에서는 내가 아는 엄마의 모습과는 또 다른 정체성을 가지고 살았던 젊은 시절의 엄마를 잠시나마 엿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부동산에서도 그 예산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이 보증금에 이 월세면 별수 없다고 했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안전을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다. 보일러가 주방 안에 달려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거나 온갖 해충과 곰팡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불온한 욕심일까? 돈이 없다고 해서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게 당연한 걸까?
살아가는 데 필요한 최소한의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누구나 행복하게 지금 살고 있는 집에 만족할 수가 있는 거였다. 부모님은 지금의 생활을 유지하는 데 만족했다.
나는 땅에 대한 헛된 희망을 가지고 있는 부모님을 시종일관 비판적인 시선으로 바라봤다. 내가 하면 투자고, 남이 하면 투기라는 식의 이중 잣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일확천금의 행운을 우연적으로 노리는 태도가 비윤리적으로 느껴졌다.
사람의 마음이 어찌나 간사한지 남의 일일 때는 쉽게 비난할 수 있었는데 내 일이 되니 그러기가 쉽지 않았다.
STEP3. 책에서 깨달은 것
한 가족의 흥망성쇠가 내가 지금 살고 있는 대한민국, 서울(수도권)에서 일어난 일인 것 자체가 흥미로웠다. 그것을 관심이 있는 땅과 부동산의 관점에서도 풀어낸 책인 듯 해 재밌게 읽었다. 나는 내가 태어난 후 부터 지금까지의 모습의 서울밖에 알지 못한다. 내가 10살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서울이라는 땅에 강북과, 강남의 격차가 벌어져가고 있었고, 부자들은과 부자가 아는 사람들이 사는 모습이 구획 지어져있었다. 이 책을 통해서 그전에 어떻게 강남이라는 지역이 형성 되었는지, 계획된 도시에 균질하고 깨끗한 환경의 아파트가, 상권이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특별하게 다가왔을지 한 가족의 이야기를 통해서 엿보니 더 생생하게 보이고 느껴지는 듯 하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터 있었던 “한강의 기적”이라는 말이 어떻게 시작되고 만들어 졌는지를 볼 수있었다. 서울로 홍수 처럼 밀려들어오는 사람들의 정부주도로 쳐내기 힘든 물량의 거주문제를 해결하기위해 (턱없는 물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민간건설사에, 그리고 소규모 건설사에 낮은 문턱으로 건설을 허용하고 마구잡이로 집을 짓도록 허용했던 시절. 그리고 어느정도 해결된 (지금도 해결된 것 같지 않지만) 거주문제, 그리고 자연스럽게 소외 되는 소규모 건설업체들.
뭐든 빠르고 거칠게 이루어져 나가는 것 이면에는 반짝거리는 영광의 크기 만큼이나 큰 부작용을 감당해야 하는 것 같다. 의도했든 의도치 않았던 국가가 고도성장이라는 열차에 전국민들을 태우고 빠르게 오르기만 하다가 그 속도를 감당하지 못하고 충동하거나 급제동이 걸렸을 때 충격은 열차 자체보다 그 안에 탑승 했었던, 열차작 급정차 하면서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엉망진창으로 엉켜버린 승객들이 아닌가 싶다.
마회장님의 가족의 스토리를 보면서 이런 가족들이 어디 한 둘이 아니었겠나 싶다. IMF는 왜 왔는지 사회, 경제 시간에 배운 것과 는 별개로 진짜 우리 사회에서 얼마나 아직도 골이 깊은 후유증을 남기고 있는지 생각해 볼 수있었고,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난 모든 문제가 나는 엄마 아빠의 문제라도 생각했는데, 그것이 이 사회가 원인을 상당히 많이 제공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씁쓸하다.
이 때 집을 잃은 상류층은 아파트를 팔았다는것은 그냥 아파트를 매도한 것이 아니 었다. 다시는 그 생활로 돌아갈 큰 동앗줄을 끊어버린것과 같은 일이었다. 4억에 처분한 아파트는 10년도 채 안되는 시간동안 2~3배가 뛰어버렸고, 시간이 지날 수록 4억짜리 따뜻했던 보금자리는 더 멀어져만 간다. 다시 돌아 갈 수있는 희망때문에 버리지 못한 비싼 6인용 식탄은 야속하게 계속 크지에 맞지 않은 작은 집으로, 더 작은 집으로 옮겨 다녀야했고, 결국 마지막으로 옮긴 작은 집에서 모든 주요공간을 차지하게 되버린다. 작아진 공간에서 실제로 커지지 않았지만 감당이 되지 않은 크기가 되어버린 식탁은 모습은, 자산과 재기의 가능성을 계속줄어들고 그에 비례해서 헛된 희망과 미련만은 점점더 커져만 가는 그 미련의 크기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듯 했다.
꼭 대궐처럼 넓어서가 아니고, 한강뷰가 보여서가 아니고, 입지가 좋아서가 아닌, 어떤이들에게는 그저 안전하고 숨통이 트이는 곳에서 산다는 것이 남은 생을 얼마나 인간적인 감정들을 누리며 살 수있는냐의 문제인 것 같다.
투자 공부를 시작하면서 나도 모르게 투자 아파트, 집들을 투자 대상으로만, 어떤 그 건물의 가치와 입지가 어떤지만 보고 가격만을 매기고 있었나보다. 내가 보고 있는 집들은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기 위해, 행복이라는 것을 누리기 위해 어떤 이들에게는 꿈이었고, 삶의 모든 것일 수도 있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한국사회에서 웃음거리가 되는 임대 아파트이지만 이 보다 더 열악한 환경에서 사는 사람들이게는 이 만큼 위험하지 않은 곳에서 살아가면서 다시금 웃는 70이 넘은 엄마와 아빠. 의식주에서 주에 해당하는 가장 중요하고 기본적인 인간의 삶의 요소조차 누릴 수없는 사연이 있는 사람들에게 사회가 최소한의 안전망을 제공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둡기만 했던 가족에게 새로운 웃음을 선물해 줄 수 있구나 생각했다.
감성적인 이야기에서 잠깐 벗어나 그래서 투자적으로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 들이 했던 것들을 투자라고 볼 수있을까? 그들은 열심히 였고, 최선을 다해 돈을 벌었다. 정부가 준 기회를 잘 이용했고, 넘쳐나는 기회와 현금의 파도속에서 그들의 몫을 잘 챙겨가면서 살고 있었다. 무엇을 그들을 무너지게 했을까. 정말 단 한순간의 실수였던 것일까?
그들의 사업은 어떤 철학과 기준이 없었고, 무엇보다 리스크관리가 전무했다. 철학과 기준은 경험으로부터 쌓이는 것이니 그렇다 쳐도, 리스크 관리를 하지 않으면, 무너졌을 때 정말로 다시 회복 불가능한 상태가 될 수도 있다는 것을. 정말로 재기 불능으로 망할 수 있다는 것을 배웠다.
소득이 늘어나도 흥청망청하지 말았어야 했으며, 잘 알지 못하는 사업에 몰빵하는 일은 없어야했으며, 감당하지 못한 빚을 대비없이 했으면 안되는 것이었다. 승승장구만 했던 사람들은 어떤 리스크가 올거라고 예측하기 힘들다. 예측한다하더라도 나는 비껴가겠지 생각하기 쉬울 것이다.
리스크를 관리해 나가면서 늘 그 위험에 대해서 경계하면서도 그렇다고 너무 소극적인 투자자가 되지 않도록 올바른 기준과 원칙을 지켜나가는 것. 함부로 무단횡단하지 않는 것. 그것을 지켜 나가는것이 순간의 수익률을 높이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이상하고 평범한 마회장님 가족을 통해서 생생하게 배웠다.
STEP4. 책에서 적용할 점
위험에 대한 대비가 없는, 한 방은, 한 방에 갈 수있음을. 그것은 정말 재기불능상태까지 갈 수있음을 기억하고 경계하자.
무슨일이 있어도 가치있는 자산을 지킨다. 그것을 가장 먼저 포기 하는 순간. 돌아가는 길은 점점 더 멀어진다.
STEP5. 책 속 기억하고 싶은 문구
“제일 힘들었던 부분은 내 통제를 못했던 게 힘들었던 거야. 내가 수입이 좋았을 때 내가 알아서 어떤 목표를 세워서 그만한 돈을 주면 단 얼마라도 저축을 해야 하는데… 우리는 돈이 마르지 않으니까 샘솟는 우물이랄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획 없이 살았는 거지. 아빠가 항상 사업해서 잘될 거라고만 생각했지 내리막이 있을 거라고 생각은 못 했던 거지. 그래서 지금 생각해보면 내 통제가 참 없었구나. 과소비하고. 그랬던 게 후회되고.”
오랜 시간 동안 직접 경험해왔던 부동산에 대한 믿음을 바탕으로 부모님은 과감한 결정 혹은 과도한 욕심으로 ‘올인’해버렸고 부모님의 이번 베팅은 성공적이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과거의 도시개발 과정을 살펴보니 그 이면에는 사람들의 투기를 부추기고 책임지지 않는 한국 사회가 있었다.
인생이 다 그런 것이라며, 이 사회가 그런 곳이라며, 힘든 사람이 우리뿐이 아니고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며, 이런 순간도 앞으로 내가 살아가는 데 하나의 경험이 될 거라며, 내 인생에서 실패하지 않으려면 꿋꿋하게 이런 경험도 해야 되는 거라며, 우리 딸은 알아서 잘할 거라며 나를 다독여주었다.
부동산에서도 그 예산이면 어쩔 수 없이 포기해야 하는 것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상기시켜주었다. 이 보증금에 이 월세면 별수 없다고 했다.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중에서도 안전을 제일 먼저 포기해야 했다. 보일러가 주방 안에 달려 있는 집에서 살아야 하거나 온갖 해충과 곰팡이를 감수해야만 했다.
가진 것도 없으면서 더 좋은 환경에서 살고 싶다는 것이 불온한 욕심일까? 돈이 없다고 해서 이런 환경에서 사는 게 당연한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