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글로벌 반도체 시장, 그중에서도 고대역폭 메모리(HBM)를 비롯한 고성능 메모리 반도체 세그먼트는 구매자에게 휘둘리는 ‘을’에서 구매자를 휘두르는 ‘슈퍼 을(乙)’이 되었다. 전통적인 제조업 생태계에서는 구매자(수요)가 갑이 되고, 부품을 공급하는 제조사가 을이 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지금의 메모리 반도체 산업은 이 공식을 완벽히 뒤엎었다. 세계에서 가장 돈을 잘 벌고 시가총액 최상위를 다투는 초거대 빅테크 기업들이 거꾸로 메모리 반도체 공급사들의 눈치를 보며, 제발 물량을 달라고 애원하는 기현상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권력 이동의 근본적인 배경에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이 사활을 걸고 벌이는 ‘인공지능(AI) 패권 경쟁’이 자리 잡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 구글, 메타, 아마존, 테슬라 등 전 세계를 호령하는 기업들이 인프라 구축에 천문학적인 자금을 쏟아붓는 이유는 단순히 새로운 성장 동력을 발굴하는 수준을 넘어섰다. 이것은 기업의 생존, 나아가 미래 디지털 영토의 지배권을 결정짓는 단 한 번의 전쟁이기 때문이다.
이 비이성적으로 보일 만큼 과열된 경쟁 체제를 가장 잘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이 바로 게임이론의 대표적 모델인 ‘죄수의 딜레마(Prisoner's Dilemma)’이다.

두 명의 죄수가 수사관의 심문을 받을 때, 어느 누구도 자수하지 않고 끝까지 침묵(거짓말)을 유지하면 두 사람 모두 가벼운 형량만 살고 풀려날 수 있다. 그것이 전체 관점에서 가장 이롭고 합리적인 선택이다. 그러나 상대방이 먼저 자백해 버릴지 모른다는 극심한 불안감 때문에, 결국 두 죄수는 각자 자백하는 길을 택하고 공멸로 치닫게 된다.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의 상황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모든 빅테크 기업이 서로 신뢰하며 속도를 조절하고, 시장의 수요에 맞춰 천천히, 그리고 효율적으로 AI 설비투자(CAPEX)를 진행한다면 가장 이상적일 것이다. 무리한 지출을 줄여 재무 건전성을 지키면서도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냉혹한 자본주의 시장에서 이러한 신사협정은 불가능하다. 만약 우리 기업이 숨을 고르는 사이, 경쟁사 중 단 한 곳이라도 미친 듯이 자본을 투입해 인공지능 시장에서 압도적인 1등 자리를 선점해 버린다면 어떻게 될까? 그 순간 나머지 추격자들에게는 떨어지는 부스러기조차 남지 않게 된다.
특히 인공지능은 과거의 스마트폰이나 인터넷 혁명과는 질적으로 다른 특성을 지닌다. AI는 인간이 데이터를 입력해 주어야만 움직이는 단순한 도구가 아니다. 스스로 학습하고, 오류를 교정하며, 스스로 성능을 개선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다.
이 때문에 가장 먼저 인간 수준의 지능을 가진 범용인공지능을 달성한 기업은, 그 자가 발전 속도를 바탕으로 신의 영역이라 불리는 초인공지능 단계에 순식간에 도달하게 된다. 먼저 앞서간 초인공지능은 뒤늦게 출발한 후발 주자들의 인공지능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시장을 독점할 수 있는 파괴력을 가진다.

빅테크 최고경영자(CEO)들이 주주들의 눈총과 시장의 우려 속에서도 "지금은 과잉 투자의 위험보다 과소 투자의 위험이 훨씬 크다"고 입을 모으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투자 효율성(ROI)이나 단기적인 손익계산서 따위는 지금 중요하지 않다. 지금 그들이 벌이는 싸움은 수익률 게임이 아니라, 미래의 생존이 달린 마지막 싸움이다.
지구상의 모든 자원과 자본에는 한계가 있다. 무한할 것만 같은 빅테크의 금고도 언젠가는 바닥을 드러내기 마련이며, 이 광기 어린 AI 인프라 치킨게임이 영원히 지속될 수는 없다.
천문학적인 AI 데이터 센터 유지 비용과 전력 확보 비용, 그리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반도체 대금을 감당하지 못하는 자본력이 약한 기업들부터 하나둘 대열에서 이탈하며 쓰러지기 시작할 것이다. 결국 시간이 흐르면 안개가 걷히듯 시장이 재편되고, 최후의 승자로 남은 소수의 초거대 기업만이 AI 시장을 과점하는 구조로 재편될 것이 자명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이처럼 빅테크 시장이 소수의 승자로 정리가 끝나는 시점은 현재 ‘슈퍼 을’의 지위를 누리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가장 치명적이고 어두운 시기가 될 가능성이 높다.
현재 고성능 HBM 반도체를 시장에 안정적으로 공급할 수 있는 제조사는 전 세계에 단 3개 사(삼성전자, SK하이닉스, 마이크론)에 불과하다. 반면 이를 사 가려는 빅테크 수요자는 공급사보다 훨씬 많다. 파는 사람은 셋인데 사려는 사람은 줄을 서 있으니 무게중심의 추가 메모리 기업으로 완벽히 쏠려 있는 것이다. 공급자가 가격 결정권을 완전히 쥐고 흔드는 구조다.
그러나 미래에 경쟁에서 탈락한 기업들이 사라지고, HBM을 구매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빅테크 기업이 3개 이하로 줄어들게 되면 상황은 180도 뒤바뀐다. 무게중심의 추가 메모리 기업에서 살아남은 거대 거물 빅테크 기업으로 급격히 이동하게 된다.
시장 경제의 가장 단순하면서도 강력한 진리는 "물건을 사주는 사람이 많을 때는 파는 사람이 왕이고, 물건을 사주는 사람이 얼마 없을 때는 사주는 사람이 왕이다"라는 점이다. 구매자가 몇 안 되는 '수요자 독점(Monopsony)' 시장이 형성되면, 살아남은 빅테크들은 막강한 바잉 파워(Buying Power)를 무기로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마진을 압박하고 단가 인하를 요구할 것이다. 지금의 달콤한 초고수익 공급자 우위 시장은 신기루처럼 사라지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기업이 이 가혹한 죄수의 딜레마를 끝까지 버텨내고 최종 승자의 왕좌에 앉게 될까?
냉정하게 시장을 분석해 보면 두 가지 핵심 조건을 동시에 충족하는 기업이 될 것이다.
첫째는 '영업활동으로 인한 현금흐름(CFO)'이 독보적으로 풍부한 기업이며, 둘째는 자체적인 'AI 풀스택' 생태계를 구축한 기업이다.
인프라 경쟁은 장기전이다. 엄청난 규모의 설비투자 비용을 외부 차입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 사업에서 발생하는 압도적인 현금 창출 능력으로 조달할 수 있는 기업만이 지치지 않고 레이스를 완주할 수 있다.
AI 인프라의 하드웨어(칩, 서버, 데이터 센터)부터 소프트웨어 프레임워크, 거대언어모델(LLM), 그리고 최종 사용자 서비스(애플리케이션)에 이르기까지 A부터 Z까지를 모두 수직 계열화한 'AI 풀스택' 역량은 레이스 완주에 필수 조건이다. 풀스택을 갖춘 기업은 자체 칩을 설계해 내재화하고 시스템을 최적화함으로써, 경쟁사들보다 훨씬 더 저렴한 비용과 높은 전력 효율로 데이터 센터를 구축하고 운영할 수 있다. 비용 효율성에서의 차이는 장기 치킨게임에서 생사를 가르는 핵심 경쟁력이 된다.

단기 및 중기적인 투자 관점에서 본다면, 당분간 빅테크 기업들이 벌어들이는 막대한 자본과 "부(富)"는 하드웨어를 쥐고 있는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에게 이전될 것으로 보인다. 빅테크의 비용 지출이 그대로 메모리 기업들의 매출과 이익으로 꽂히는 구간이다.
이러한 국면에서 빅테크 기업들이 메모리 기업들의 과도한 권력을 제어하고 힘을 빼기 위해 쓸 수 있는 가장 유효한 카드는 '공급처 다변화'다. 예컨대 기술력이 빠르게 올라오고 있는 가격 경쟁력 높은 중국 메모리 기업들의 칩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기존 3사 체제를 흔드는 방식이다.
그러나 글로벌 정치·경제적 현실을 고려할 때, 이러한 시나리오가 실현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현재 미국과 중국 간의 패권 갈등과 깊어지는 불신의 골은 단순히 관세 전쟁 수준을 넘어 공급망에서 중국을 점차 배제하는 단계로 진입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국방수권법을 보더라도, 2027년 12월부터 중국산 반도체가 단 1개라도 포함된 모든 완제품 및 부품은 미국 정부 조달 사업 및 핵심 인프라 사업에서 완전히 배제되도록 규제가 강화된다. 미국 시장과 정부 사업을 포기할 수 없는 글로벌 빅테크 기업들 입장에서 중국산 메모리는 아무리 싸도 선택하기 힘든 '독 사과'인 셈이다.
결국 국가 안보와 기술 안보라는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한, 서방 세계의 공급망 안에서 움직이는 핵심 메모리 반도체 기업들의 지위는 견고하게 유지될 것이다. 빅테크의 치열한 전쟁 속에서 당분간 폭발적인 이익을 향유할 주체는 바로 이 ‘슈퍼 을’들이며, 우리는 이 거대한 부의 이동 경로를 주시하며 투자 기회를 포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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