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전 세계 테크 산업의 중심에는 거대언어모델(LLM)을 개발하는 오픈AI(OpenAI), 앤스로픽(Anthropic)의 클로드, 그리고 구글의 제미나이(Gemini)가 있다. 이들은 인간의 지능을 뛰어넘는 인공지능을 구현하기 위해 매년 천문학적인 자금과 인프라를 쏟아붓고 있다.
그런데 최근 이 치열한 전장에서 매우 흥미롭고도 역설적인 현상이 관찰되고 있다. 각각 전혀 다른 기업 환경에서, 서로 다른 개발자들에 의해 독자적으로 설계되고 학습된 인공지능 모델들임에도 불구하고, 버전이 거듭될수록 성능과 산출물, 그리고 작동 방식이 놀라울 정도로 닮아가고 있다는 점이다.
최고 수준의 프론티어 모델들이 보여주는 답변의 퀄리티, 추론 능력, 그리고 텍스트 및 멀티모달 처리 방식은 이제 전문가조차 블라인드 테스트로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상향 평준화되고 있다. 인공지능 모델 간의 절대적인 기술적 격차와 차별점이 점점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경영학에서는 이처럼 제품이나 서비스의 독점적 기술 장벽이 허물어지고, 시장에 공급되는 재화의 특성이 비슷해져 차별화 요소가 없어지는 현상을 ‘범용화(Commoditization)’라고 부른다. 선구자가 개척한 고도의 기술이 시간이 흐르며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공공재 성격의 기술로 변모하는 과정이다. 몇 년전만 하더라도, 정말 맛있는 돈까스는 줄을 서서 먹어야 했다. 하지만, 요즘 돈까스들은 모두 상향 평준화 되어서, 생고기 등심을 사용하는 것과 신선한 기름에 튀기는 것은 범용화가 되어버렸다.

이해를 돕기 위해 필자의 개인적인 경험을 하나 소개하고자 한다. 필자가 2005년 처음 기업에 입사할 당시만 하더라도, 조직 내에서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능력’은 그 자체로 엄청난 무기이자 독보적인 차별점이었다.
당시에는 글로벌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는 인력이 귀했기 때문에, 회사에서 해외 바이어와의 중요한 미팅이 있거나 복잡한 영문 계약서 번역, 통역 업무가 필요할 때마다 항상 가장 먼저 불려 다니며 핵심 인재로 대접받았다. 어학 능력이라는 장벽이 나만의 강력한 '경제적 해자' 역할을 해준 셈이다.
그러나 이러한 차별점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불과 몇 년 뒤 대리 직급을 달았을 때부터 분위기가 급변하기 시작했다. 조기 유학이나 어학연수, 글로벌 경험을 기본 스펙으로 장착한 후배들이 대거 입사하기 시작한 것이다.
과거에는 조직 내에서 특별했던 능력이, 이제는 신입 사원이라면 누구나 갖추어야 할 고유의 기본 역량이 되었다. 능력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똑똑한 후배님들의 공급이 넘쳐나면서 ‘범용화’된 것이다. 차별점이 사라지자 과거에 누리던 회사 내 인기가 점차 식어갔다.
현재 글로벌 AI 시장이 직면한 운명도 이와 정확히 일치한다. 오픈AI도, 앤스로픽도, 구글도 결국은 ‘범용화’되어 가고 있다. 어찌보면 당연한 수순이다. 3개 회사 모두 많은 데이터와 많은 GPU를 통해 인공지능 성능을 개선해왔기 때문이다.
제품이나 서비스가 범용화 단계에 접어들면, 기업들이 생존을 위해 펼칠 수 있는 마지막 무기는 단 하나, 바로 ‘치열한 가격 경쟁’뿐이다. 실제로 지금도 자본이 부족한 전 세계 수많은 독립 개발자들과 스타트업들은 비용 절감을 위해 오픈AI의 유료 모델 대신 오픈소스로 풀린 모델이나, 상대적으로 단가가 압도적으로 저렴한 중국계 AI 모델들을 적극적으로 채택하여 서비스를 구축하고 있다. 성능 차이가 크지 않다면 가장 싼 공급처를 택하는 것이 ROI를 높이기 좋다.

그렇다면 AI 모델 자체가 공기나 전기처럼 어디서나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범용재가 되는 미래에는 어떤 기업이 생태계의 꼭대기에 서서 막대한 부가가치를 흡수하게 될까?
그 해답은 다름 아닌 ‘대체 불가능한 독점적 데이터’를 보유한 소프트웨어 기업에게 있다.
현재 수많은 전통 소프트웨어 및 SaaS(서비스형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역설적이게도 주식 시장에서 철저히 소외당하고 있다. 거대 테크 기업들이 AI 인프라를 독식하는 동안, 정작 이 인공지능을 도입해야 할 레거시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고비용 구조에 가로막혀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빅테크의 AI 모델 사용료(API 호출 비용 등)가 너무 비싸서, 이 모델을 자사 서비스에 전면적으로 결합했다가는 마진이 박살 나는 구조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상황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현재 테크 진형의 기술 발전 추세를 보면, 인공지능 연산에 들어가는 하드웨어 비용과 API 단가는 기하급수적으로 저렴해지고 있다. 마치 과거 컴퓨터 CPU의 성능이 유전공학의 발전 속도보다 빠르게 대중화되었던 것처럼 말이다. 이는 지금까지 소외당하던 소프트웨어 기업들에게 기회의 문이 열리고 있음을 시사한다.
AI 모델의 사용료가 극도로 낮아지면, 소프트웨어 기업들은 비용 부담 없이 저렴해진 인공지능 엔진을 자사 시스템의 코어에 마음껏 이식할 수 있게 된다. 인공지능 사용 비용의 하락은 다양한 산업군으로의 침투율을 폭발적으로 높일 것이며, 결과적으로 전체 AI 사용량 자체를 기하급수적으로 확장시키는 기폭제가 될 것이다.
돈만 내면 누구나 구글이나 오픈AI의 똑같은 최첨단 대형 언어 모델을 가져다 쓸 수 있는 환경이 완성되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런 세상에서는 대중에게 공개된 인터넷 서적이나 웹서핑 데이터로 학습된 범용 AI의 답변 수준은 모든 기업이 대동소이할 것이다.
이때 최종 승부를 가르는 결정적 한 방은 인터넷 공간에 떠돌아다니지 않는 데이터, 즉 ‘기업 내부에 깊숙이 갇혀 있는 고유의 B2B 데이터’와 ‘실제 고객들의 실시간 행동 데이터’이다.
예컨대 특정 산업군에서 수십 년간 축적된 고객들의 구매 이력, 물류 공급망 데이터, 기업 내부의 정산 및 회계 기록, 그리고 타사는 절대 접근할 수 없는 독점적인 고객 데이터베이스를 확보한 소프트웨어 기업이 있다고 치자. 이들은 헐값으로 떨어진 빅테크의 AI 엔진을 가져와 자사의 독점 데이터 위에서 구동시킬 것이다. 그 결과물은 경쟁사들이 결코 흉내 낼 수 없는 압도적이고 차별화된 맞춤형 서비스로 고도화된다.
결국 인공지능의 상향 평준화는 고유 데이터를 가진 이들에게 축복이 된다. ‘경제적 해자(Economic Moat)’가 AI의 순수 기술력에서 데이터의 독점적 보유량으로 완벽히 이동하는 중이다.
소프트웨어 기업들 중, 자신들만의 강력한 비즈니스 데이터 생태계를 확고히 구축하고 있는 숨은 진주들을 그 어느 때보다 관심갖고 지켜봐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