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아가신 어머니께서는 생전에 나를 보며 늘 "역마살이 단단히 껴있다"고 말씀하시곤 했다. 그 말씀이 일종의 예언이었을까. 돌이켜보면 나의 삶은 단 한 순간도 한곳에 오래 머물지 못했다. 태어난 이후 유년 시절에는 2년에 한 번꼴로 새로운 지역으로 이사를 다녀야 했고, 20대의 대부분은 고국을 떠나 미국이라는 낯선 땅에서 유학 생활을 하며 보냈다. 역마살의 에너지는 30대에 이르러 정점을 찍었다. 해외영업 부서에 발령받으면서, 전 세계 수많은 나라의 영토를 밟고 하늘길을 오가는 것이 나의 일상이자 직업이 되었다.
그렇게 수많은 국가를 돌아다니며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과 부딪치고 회사업무를 수행하는 동안,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한국인은 개개인의 지적 능력, 업무 몰입도 등이 전반적으로 뛰어나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 뛰어난 개인들이 하나로 뭉쳐 시너지를 내는 경우는 많이 보지 못했다. 반면 중국인들은 단체로 뭉쳐서 하나의 목표를 향해 나아가는 조직력이 우수했다.

단편적인 예로 유학 시절의 기억을 떠올려본다. 중국인 학생들에게는 대를 이어 전해 내려오는 상상 초월의 '시험 족보 데이터베이스'가 존재했다. 그들은 시험이 끝나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자 기억해 낸 문제를 공유했고, 이를 바탕으로 족보 데이터베이스를 실시간으로 업데이트했다. 한 명의 기억력은 미미하지만, 수십,수백,수천 명의 기억이 정교하게 연결되자 방대한 데이터베이스가 되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 유학생들에게는 이러한 족보가 없었다. 한국인들은 각자도생하기 바빴고 족보와 같은 집단 지성의 시스템을 구축하지 못했다.
이러한 민족성의 차이는 해외에서 일하는 자영업자들 사이에서도 그대로 드러났다. 해외에서 장사를 할 때, 중국인들은 여러 명이 힘을 합쳐 일단 상가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다. 그 안에서 서로 협력하며 거대한 상권을 형성해 나갔다. 반면 한국인들은 연대하여 건물을 취득하기보다는, 개별적으로 임대차 계약을 맺고 밤낮없이 열심히 장사하는 데 집중했다.
세월이 흐른 뒤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중국인들은 장사로 번 현금 흐름에 더해, 함께 매입한 부동산의 가치 상승이라는 거대한 자본 이득까지 취하며 부를 차곡차곡 쌓아 올렸다. 반면 한국인들은 제아무리 장사로 돈을 많이 벌어도, 훗날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진 월세를 감당하지 못해 결국 피땀 흘려 일군 가게를 접거나 다른 외곽 지역으로 밀려나는 젠트리피케이션을 겪어야 했다. 개별적인 열정이 집단의 자본력을 이기지 못한 것이다.
뜬금없이 유학 시절과 해외 영업 시절의 경험담을 늘어놓은 이유는, 최근 기술 생태계의 중심에 서 있는 두 기업, 엔비디아(NVIDIA)와 세레브라스(Cerebras)의 구조적 차이를 설명하기 위해서다. 이 두 기업이 인공지능(AI)을 구현하기 위해 채택한 아키텍처는 앞서 언급한 한국인과 중국인의 생존 방식과 놀라울 정도로 닮아 있다.

현재 AI 반도체 시장의 절대 강자인 엔비디아는 '중국인들의 거대한 협업 시스템'과 같다. 엔비디아는 수많은 개별 GPU(그래픽처리장치)를 고속의 인터커넥트 기술로 촘촘하게 연결하여, 하나의 거대한 가상 컴퓨터처럼 작동하게 만든다. 칩 하나하나의 성능도 훌륭하지만, 진짜 무기는 수만 개의 칩이 한 몸처럼 움직여 초거대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병렬 컴퓨팅 생태계에 있다.
반면, 이에 도전장을 내민 스타트업 세레브라스는 '개인 역량을 극한으로 끌어올린 한국인'의 모습을 하고 있다. 세레브라스는 일반적인 반도체 공정처럼 웨이퍼를 칩 단위로 쪼개지 않는다. 무려 30센티미터 크기의 웨이퍼 한 장을 통째로 하나의 칩(Wafer-Scale Engine)으로 사용한다. 이 거대한 단일 칩 안에 연산 장치(코어)와 메모리를 한데 집어넣어, 개별 칩 자체의 역량을 극대화한 것이다.
두 회사의 장단점은 아키텍처의 태생적 한계에서 비롯된다. 엔비디아는 수많은 칩을 병렬로 무한히 연결할 수 있어 인류가 상상하는 초거대 AI 모델을 학습시키는 데 매우 유리하다. 다만, 칩과 칩을 물리적으로 연결하는 과정에서 막대한 에너지 소모와 병목 현상, 그리고 엄청난 네트워크 구축 비용이 발생한다. 반면 세레브라스는 웨이퍼 한 장 안에서 모든 연산과 메모리 이동이 이뤄지므로 칩 간 연결에 따른 에너지 낭비가 없고 속도가 압도적으로 빠르다. 그러나 단일 웨이퍼라는 물리적 공간의 한계가 존재하기에, 엔비디아처럼 유연하게 스케일을 확장하여 대규모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는 상대적으로 불리하다.
일부 자극적인 콘텐츠를 양산하는 유튜버들은 세레브라스의 혁신적인 칩이 등장했으니 당장이라도 엔비디아가 망할 것처럼 호들갑을 떨곤 한다. 하지만 이는 기술의 본질을 오해한 발상이다. 두 기업은 태생적으로 겨냥하는 목적지가 다르다. 엔비디아는 수만 개의 칩을 유기적으로 연결해 인간의 뇌에 버금가는 초거대 모델을 '학습(Training)'시키는 데 절대적인 우위가 있고, 세레브라스는 이미 완성된 AI 모델을 바탕으로 지연 시간 없이 밀리초(ms) 단위로 빠르게 정답을 출력하는 '추론(Inference)' 영역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강점을 지닌다.
독점적 지위를 가진 엔비디아 역시 세레브라스가 쥐고 있는 '고속 추론'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다. 그렇기에 엔비디아는 최근 저전력 고속 추론 및 AI 연산 효율화를 주도하는 글로벌 핵심 인재들과 관련 스타트업들을 빠르게 영입하고 인수하며 자신들의 약점을 보완하고 있다. 만약 세레브라스가 추론 시장의 파이를 본격적으로 키워나가기 시작한다면, 자본력과 생태계를 쥐고 있는 엔비디아 역시 유사한 개념의 웨이퍼 스케일 아키텍처나 차세대 추론 특화 칩을 시장에 론칭하며 정면 대응할 가능성이 높다.

투자자의 관점에서 우리가 가장 유의해야 할 지점은 바로 이 대목이다. 세레브라스와 같은 신생 혁신 기업들은 기술적으로는 눈부신 성취를 보여줄지언정, 비즈니스 모델 관점에서는 아직 안정적인 이익을 창출하지 못하는 '적자 상태'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돈을 벌지 못하는 기업이 연구개발을 지속하고 생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회사채를 발행하거나 유상증자를 통해 시장에서 끊임없이 자금을 수혈받아야만 한다.
지금의 매크로(거시경제) 환경을 냉정하게 진단해 보자. 현재 글로벌 경제는 인플레이션의 불씨가 완전히 꺼지지 않은 상태다. 이로 인해 고금리 기조가 예상보다 훨씬 길게 유지될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다. 금리가 높다는 것은 기업의 자금 조달 비용, 즉 생존 비용이 천문학적으로 치솟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금리가 고공행진을 하는 구간에서는 고성장 적자 기업의 주가는 작은 충격에도 쉽게 흔들리고 깊은 조정을 받기 마련이다.
반대로 향후 금리가 본격적으로 인하되는 사이클이 도래한다면 자금 조달의 숨통이 트이고 미래 현금 흐름의 가치가 높게 평가된다. 이럴 때에는 내러티브가 좋은 기업들의 주가가 탄력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처럼 '강한 경제와 인플레 위험'이 공존하는 매크로 국면에서는, 돈을 벌지 못하는 적자상태의 고성장 기술주에 공격적으로 베팅하는 것은 위험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