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시흥 은계지구의 LH 10년 공공임대 당첨.
1억 남짓한 보증금에 월세 20만 원으로 누리는 신도시의 쾌적함은 아무것도 없던 시절의 제게 완벽한 안식처였습니다.
문을 나서면 펼쳐지는 호수공원, 버스 2-30분 타면 7호선 천왕역, 그리고 직장까지 단 세 정거장. 은행 대출의 압박 없이 그저 번 돈을 즐겁게 쓰며 살 수 있었던 이 달콤한 온실이, 훗날 제 자산 형성의 발목을 잡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습니다.
균열은 2021년 부동산 폭등장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딸아이의 발레학원 대기실에서 동네 아저씨들이 나누던 "우리 아파트 곧 10억 간다"는 무용담은 저를 한없이 작아지게 만들었습니다. 아직 조기 분양을 받으려면 한참이나 남은 공공임대 아파트. 남들은 자산의 사다리를 타고 저 멀리 올라가는데, 저만 우물 안에 갇힌 것 같았습니다.
여기에 십수 년을 몸담은 회사에서는 젊고 실력 있는 후배들이 치고 올라왔고, 매년 공채 시즌마다 '회사 밖을 나가면 난 뭘 먹고살지?' 하는 서늘한 위기감이 덮쳐왔습니다.
결국 2025년 9월,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다는 절박함으로 열반스쿨 기초반으로 월부의 문을 두드렸고, '26년 상반기 1호기 매수'라는 목표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습니다.
"여기가 내 집인 것 같아!"
25년 10월 실준반.
배움이 얕아 용감했던 걸까요. 집을 내놓지도 않은 상태에서 앞마당을 만든다며 평촌으로 향했습니다. 장모님과 함께 살아야 하기에 '방 3개, 화장실 2개'라는 조건을 쥐고 찾은 관악타운 부영 아파트. 빈 거실을 가득 채운 반짝이는 햇살과 베란다 너머로 펼쳐진 관악산의 풍경은 단숨에 저희 부부의 마음을 빼앗아 버렸습니다.
하지만 현실은 냉혹했습니다. 내 집을 사줄 매수자가 없어 가계약금 1천만 원조차 걸 수 없는 처지.
부동산 사장님과 긴 대화를 나누며 어떻게 잡아보려고 애써보았지만, 결국 그 집은 며칠 뒤 다른 사람의 품으로 떠나버렸습니다.
25년 11월 서투기.
이어진 광명 임장에서는 더 매운맛을 봤습니다. 회사 근처 7호선 역세권인 한진타운과 쌍마한신에 꽂혀 부동산을 찾았지만, 소장님 앞에서 제 상황과 속마음을 너무 투명하게 오픈해 버린 것이 화근이었습니다. "집부터 팔고 다시 오세요." 그 자리에서 매물 임장마저 취소당하는 굴욕을 겪으며, 뼈아픈 실전의 룰을 하나 깨달았습니다.
'절대 내 패를 먼저 다 보여주지 마라.'
시간은 흘러 2026년 1월 내마기.
서울 실거주라는 목표를 품고 내가 준비할 수 있는 금액대에 맞는 지역을 조사함과 동시에 상급지 과천으로 분임(분위기 임장)을 나갔던 어느 주말 점심, 마침내 운명의 전화벨이 울렸습니다.
"사장님, 살 의사가 거의 확실한 분이 왔어요! 근데 이 금액까지 맞춰주셔야 해요. 저희 동네는 아직은 급매 아니면 절대 못 뺍니다!"
심장이 요동쳤습니다.
바쁜 아내에게 급히 문자를 보냈고, 저희는 제대로 된 계산도 없이 "해보자! 잘 될 거야!"라며 덜컥 매도를 결심했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공공임대였기에, 약정을 걸고 LH에 매수 신청을 거쳐 제 명의로 가져오는 데만 한 달이 걸리는 피 말리는 인고의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1주일 뒤, 장모님 명의의 집까지 매수자가 나타났습니다.
팔기로 결심하기 전, 평생을 안고 갈 로열동이라 믿었던 집을 헐값에 넘기는 것 같아 속이 쓰렸지만, 1호기 갈아타기를 위해서는 두 채를 동시에 팔아 자금을 합쳐야만 했습니다.
그렇게, 저희 가족이 몸 뉘일 집 두 채가 순식간에 사라졌습니다.
제 명의의 집에 거주하시던 부모님의 거처, 그리고 저희 세 식구와 장모님이 함께 살 '1호기'를 당장 구해야 하는, 그야말로 퇴로가 꽉 막힌 외통수 레이스가 시작된 것입니다.


2부에 계속..